[나의 목회, 나의 일생] 선교 140주년 선교유산 탐방 : 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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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교회 사가들이 홀 가족을 기억하며 떠올린 말씀이다. 

윌리엄 홀(William James Hall)은 1891년 내한한 캐나다 출신, 미 감리회 파송 의료선교사이다. 뉴욕 빈민가에서 봉사하던 중 나중 부인이 된 로제타 홀(Rosetta Hall)을 만난다. 윌리엄 홀은 1892년 6월 한국 땅에 먼저와 있던 로제타 홀과 첫 국제적 결혼식을 하게 된다. 예식장은 스크랜턴 여사의 정원이요, 땅은 조선 땅이고 신랑은 캐나다인, 신부는 미국인이어서 정원엔 3개국 국기가 게양되었다. 

두 사람은 평양에 거주하던 유일한 서양인으로 병원을 세우고 의료선교를 시작한다. 1891년 내한, 1892년 결혼, 1893년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이 태어난다. 그리고 1894년 청일 전쟁이 발발, 평양엔 콜레라가 창궐하게 된다. 윌리엄 홀은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도 없이 전쟁터를 누비며 환자들을 돌보다가 건강이 악화되어 서울로 이송, 치료를 받던 중 1894년 11월 24일 로제타 홀의 뱃속에 유복녀 에디스 홀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다. 장례식은 배재학당 채플, 노블 선교사의 집례로 거행되고 양화진에 묻힌다. 홀 가족의 묘비엔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국 땅에 먼저 온 선교사님들이 교회, 학교, 병원을 세워 선교를 하던 중 한국 여성들은 남자 의사에게 진료받기를 꺼려하고 있어서 여성 의사들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그리하여 로제타 홀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당시 이화학당 내 「보구여관」(현, 이화여대 부속병원) 2대 원장으로 섬기게 된다. 

이화학당 학생 중에 영어를 잘하던 김점동이란 학생이 통역으로 로제타 홀을 돕고 있었다. 그는 언청이를 수술해 예쁜 입술로 회복시키는 로제타 홀을 보고 자신도 의사가 될 것을 결심하고 후에 김점동은 보구여관에서 일하던 박유산과 결혼, 박에스더로 보구여관 의사로 섬기게 된다. 

남편 윌리엄 홀을 잃은 로제타 홀은 본국(미국, 캐나다)으로 돌아가 그동안 사역을 보고하고 모금을 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가는 곳마다 병원, 특히 여성병원을 세우고 활동을 한다. 특히 평양 기홀병원은 「홀을 기념한다」는 뜻이다. 로제타 홀은 최초로 한국의 맹인들을 위해 점자를 개발하고 평양 맹아학교, 농아학교 등을 세워 이 땅에 소외된 약자들을 위한 사역을 이어간다. 

유복녀 에디스 홀은 이질에 걸려 세 살 어린 나이에 양화진에 묻히고 아들 셔우드 홀은 결핵 요양원과 병원을 세우고 한국 최초로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했다.

로제타 홀은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가 살다가 한국 땅에 돌아오지 못하고 별세하지만, 그의 유골은 그녀의 유언에 따라 한국 땅 양화진 사랑하는 남편 곁에 묻혔다. 아들 셔우드 홀 또한 일제에 의해 간첩 혐의로 추방당하고 캐나다에서 별세, 그의 유골 또한 양화진으로 돌아와 그의 부모 그리고 동생 에디스 곁에 묻힌다. 양화진 언덕 양지바른 곳에 윌리엄 홀과 그의 아내 로제타 홀 그리고 아들 셔우드 홀과 세 살 때 하나님 곁으로 간 에디스 홀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죽은 셔우드 홀의 아들 프랭크 홀과 셔우드 홀의 아내요 윌리엄 홀의 며느리 메리안 홀(Marian Hall) 여섯 가족이 잠들어 있다.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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