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와 신학 사이에서
한 학기를 지나면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강의 시간마다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계와 복음의 역사, 교회의 삶을 들을 때 나의 심령은 단 샘물을 마신 듯 소생하기 시작했다. 참으로 그 속에서 치여 죽다 살아 하나님의 섭리와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한 놀라운 신앙 고백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나를 비롯해서 우리 학급의 개성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나 독특했다. 이를 통해 인격적 친교의 중요함도 깨닫게 되었다. 각자 신학하는 자세가 달라 목회 분야도 자연스럽게 나누어지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신학 학문을 주로 하는 학구파가 있는가 하면, 부흥사와 같이 교회 부흥 발전론에 강조점을 둔 그룹도 있었다. 특히 부흥 발전론자들의 개성은 더 뚜렷해 심지어는 목소리까지도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신학과 목회는 서로 상관 관계가 있음을 알고 단숨에 양자를 종합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20여 년에 걸친 신학 연구와 목회 활동을 꾸준하게 병행하면서 더 포괄적인 목회 신학을 구성하기에 이르렀다.
신학대학 교수로 나아갈 수 있는 그룹을 통해 신학적 영성 훈련을 받았다면, 부흥 발전론자들의 그룹을 통해 실천적 영성 훈련을 받아들이면서 신학의 중심축을 형성해 나갔던 것이다.
1966년의 봄은 유난히도 따뜻했다. 500여 명 남짓한 학생들은 신학 본과와 부설신학원과, 그리고 기독교교육학과로 구성되었다. 정규 교수님은 겨우 일곱 분이셨다. 그 이유는 합동 측과 통합 측으로 신학교가 양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미국연합장로교나 한국장로교 소속의 유수한 신학 교수가 몇 분 출강해 주셨는데, 그분들은 한국어에도 능통해서 훌륭한 강의를 해주셨다.
청빈과 가난의 영성 훈련
나는 신학교, 아니 ‘선지 동산’에서도 선교 헌금을 통해 학비 조달과 기숙사비, 교통비 같은 비용들을 충당했다. 그러나 항상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독지가들의 도움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청빈한 삶 속에서 오는 금식과 같은 과정은 매우 힘든 영성 훈련의 연속이었다. 어떤 때는 저녁 식사까지도 거르면서 워커힐 쪽 숲속으로 들어가 소나무를 붙들고 주님의 현존과 성령님의 임재를 체험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선지자를 길러 내기 위한 인성 교육과 영성 훈련의 강도는 대단했다. 마치 다니엘이 그의 친구들과 함께 육식을 마다하고 채식을 선택할 뿐만 아니라 풀무불 같은 연단을 거쳐 사자굴 속에 던짐을 받는 죽음과도 같은 백절불굴의 신앙 훈련이 동반되어야 했다. 교회의 여름 방학이나 겨울 방학이 되면 모두가 자기 집으로 달려가서 새 옷으로 갈아입고 맛있는 반찬들을 해오는가 하면, 어떤 친구들은 그 사이에 결혼까지 하고 나타났다. 그러나 나는 단벌 신사를 못 면하는 처지로 내복도 제대로 갈아입을 수 없었다. 수도사처럼 청빈과 배고픔 속에서 기도에 전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내 곁에서 함께 계시며 “나도 너와 함께 고난에 동참한다”는 위로의 음성을 들려주셨다.
청빈과 가난의 훈련 과정은 현실적인 문제들이었다.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먹는 것에 관한 절제였다. 나는 세 끼 식사를 다할 만큼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에 하루에 한 끼씩 금식해 오던 대학 시절처럼 점심 한 끼를 굶기로 작정했다. 그 빈 시간 동안 주로 명상하고 산책하며 주님과 교제했고, 어떤 때는 학교 오르간이 있는 방으로 가서 찬송가를 연주하면서 찬양 시간을 갖기도 했다.
나는 나무젓가락 하나를 한 달여 동안이나 사용해 본 적도 있었다. 색깔이 까맣게 변색되는 바람에 버려야 할 정도였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선택된 사명자들과 함께 선지 동산에서 영성 훈련을 받아 가는 과정 속에는 자신의 정체감(Identity)을 스스로 찾아 나서는 중대한 소명이 있어야만 한다고 믿었다. 때문에 비록 작은 실천 사항이라 하더라도 내가 일단 결심한 일은 끝까지 실행에 옮겨 보는 자기 절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단 한 벌의 옷으로 2년 간이나 버틸 수 있었다는 점 역시 수도자들이 달성해야만 할 무소유의 삶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어떤 때는 날씨가 추워서 속옷조차도 제대로 세탁해서 갈아입을 수 없었고, 어떤 때는 자격지심이 들어 동료들과 가능한 한 멀리 떨어져서 있을 정도로 신경을 쓴 때도 있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신학교 기숙사 식당은 식권제로 운영되었다. 그 당시 한 끼 식사비는 13원이었는데, 음식은 아주 보잘 것 없었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영양 결핍을 느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영적인 권능이 철저한 절제생활 속에서 형성된다는 신념만은 굽힐 수 없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