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정명여학교의 설립과 여성 교육의 발전’
10여 명으로 출발했던 목포 정명여학교는 몇 년 안 되어 벌써 25명으로 학생이 증가했는데 변창연 조사의 헌신도 컸다. 이에 목포 영흥학교도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아름다운 석조건물을 설립했으며 여기에 뒤질세라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했던 목포교회와 목포지역 주민들, 그리고 목포 선교부까지 협력해 목포 정명여학교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정명여학교는 2년 전에 조직되어 훌륭하게 운영되고 있었으며, 등록 인원도 55명이나 되었다. 한국 소녀들은 다른 외국 소녀들보다 더 빨리 배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 소녀들은 무지, 격리, 무관심으로 방치되어 있는 이웃의 불신자 소녀들과 뚜렷한 대조를 보였다. 이 나라에서 기독교의 힘에 가장 감사케 하는 증거의 하나는 기독교가 여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여인들의 처지를 점진적으로 개선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소녀들이 멀지않은 날에 학교 건물을 갖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1909년 7월 15일~31일, 18회 미국 장로교 선교부 보고서)
목포 정명여학교를 설립한 스트레퍼 여선교사는 1868년 오하이오주에서 출생했으며, 1899년 12월 27일 내한했다. 그는 이미 목포선교부에서 사역하고 있는 배유지 선교사를 도우면서 부녀자를 대상으로 선교에 임하던 중 목포 정명여학교를 창설했다. 그는 목포 정명여학교를 돌보는 한편 목포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을 가르쳤으며, 그 외의 시간을 쪼개어 목포를 중심으로 인근에 있는 군‧읍 소재지까지 5개처나 되는 확장주일학교를 지도했다. 때로는 배를 이용해 도서 지방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섬을 방문하면서 선교에 힘을 기울이기도 했으며, 이러한 관계로 목포 정명여학교는 자동적으로 홍보가 되면서 방치됐던 어린아이들이 목포에 모여 스트레퍼 선교사의 지도를 받게 됐다.
광주선교부가 창설되자 배유지 선교사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스트레퍼 선교사는 1905년 광주로 이거했으며, 역시 광주에서도 주로 확장주일학교 교육에 힘을 기울이다가 1908년 귀국했다. 그러나 그가 목포를 떠남으로 목포선교부에서는 변요한 선교사 부인이 잠시 맡아 수고를 했으나, 곧 광주로 이거해 가자 다시 하위렴 선교사 부인이 교장직을 맡게 됐다. 역시 하위렴 선교사 부인도 남편과 함께 군산선교부로 이거했다.
1908년에는 처녀 선교사로 목포에 마틴(Miss J. A. Martin. 한국명:마율리, 이하 마율리로 표기) 선교사가 부임했다. 마율리 선교사는 몰려오는 어린 소녀 학생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친절하게 잘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학교시설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시설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마율리 선교사는 1869년 캔자스 주에서 출생했으며, 일찍이 교육에 뜻을 두고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캔자스 주에 있는 캄벧사범대학을 졸업했다. 때마침 교육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했으며 곧 수속을 밟고 1908년 한국에 도착해 목포 정명여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교육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마율리 선교사는 이론을 떠나서 실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지만 시설 부족으로 늘 어려움에 부딪히자 그 당시 목포선교부에 부임한 맹현리 선교사 부부에게 학교의 실정을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은 맹현리 선교사는 곧 부인과 의논한 후 미국에 있는 본가에 연락해 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1911년 2층으로 된 석조건물 105평을 완공할 수 있게 됐다.
목포 영흥학교 석조건물 못지않은 2층 석조건물이 목포 정명여학교로 신축되자 1914년부터는 보통과 4년, 고등과 4년제를 따로 따로 신설하고 장차 한국을 이끌어 갈 여성지도자를 양성해 갔다. 그후 유서백 선교사 부인과 조마구례 선교사가 각각 교장으로 재직했으며, 마율리 선교사는 평교사로 모든 교장과 열심히 협력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사참배로 더 이상 학교를 운영하지 못하고 1938년에 폐교하게 되자, 끝까지 재산을 지키던 마율리 선교사는 감시를 견디지 못하고 1940년 목포를 떠났다.
멕콜리기념여학교와 멕콜리 선교사 부부
목포 정명여학교의 영문 표기는 멕콜리기념여학교로 되어 있다. 멕콜리(Mr. Mrs. H. McCallie, 한국명:맹현리, 이하 맹현리로 통일) 선교사 부부는 1907년 한국에 도착해 잠시 군산선교부에서 활동을 하다가 1908년 목포선교부로 이거해 귀국할 때까지 목포 지방 근교에 있는 도서 지방 사역을 담당했다.
“이 사역은 아주 새로운 사역이다. 1908년 가을 나에게 이 일이 위임되었을 때, 그때는 몇 명의 세례받은 신자들이 있는 겨우 한 교회만 있었다. 섬들은 네 개의 군(郡) 전체를 둘러싸고 있고, 숫자도 230개를 넘는다.” (1910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보고서)
그의 부인은 간호사로서 평상시에는 목포진료소에서 환자를 돌보는 일을 했으며, 그 외는 남편과 함께 도서선교에 임하면서 선교구역 내에 있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담당함과 동시에 부녀자들을 중심으로 성경공부를 지도했다.
맹현리 선교사 부부의 사역은 이미 터를 닦아 놓았던 변요한 선교사의 공이 컸다. 맹현리 선교사의 선교보고는 다음과 같다.
“작년 가을 연례 모임에서 돌아온 이후에 변요한 선교사와 나는 7개의 섬을 방문했다. 그 섬들에서 그는 2년 동안 복음 전도자들을 통해 사역을 감당해 오고 있었다. 우리는 6개의 예배 처소를 발견했는데, 그 중 3개는 앞으로 정식 교회로 발전될 것이 분명했다. 두 번째 방문에서 나는 5개 섬에서 며칠 동안 성경반을 열었고, 선생들과 조력자들과 함께 예배를 인도하고 주요 마을을 방문했다. 이 섬들 중에 한 교회에서는 50명의 소년들이 등록된 훌륭한 학교가 있었다. 12월에 나는 6개의 다른 섬을 방문했으며, 3개의 예배 처소를 발견했다.” (1908년 6월 30일~1909년 6월 30일, 목포선교부 보고서)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