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 나의 일생]   선교 140주년 선교유산 탐방 :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와 정동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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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연가」(이문세 노래)라는 노래 가사 중에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이란 말이 3번이나 나온다. “언젠가는 우리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정동제일교회는 1887년 10월 조선의 고종 때부터 137년 동안 지금까지 남아있는 교회이다.

정동제일교회를 세운 분은 미국 감리교회 선교사 아펜젤러이다. 그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제물포 인천항에 도착해 기도를 올린다. “오늘 죽음의 철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나라 백성들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자유와 빛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아펜젤러는 개혁교회에서 세례받고 신앙생활을 하던 청년이었다. 그는 감리교 부흥 집회에서 성령세례(거듭남)를 경험하고 부흥 운동과 경건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무려 3년 동안 고뇌 끝에 장로교회 신자에서 감리교회로 옮기게 된다. 그는 랭커스터 제일감리교회에 출석했다.

아펜젤러는 뉴저지주 명문 드류(Drew) 신학교를 졸업하고 웨슬리안 선교사로 헌신을 다짐한다. 그가 서울에 도착하던 그해 2명의 학생을 모아 영어를 가르치는 교육사업을 먼저 시작했다. 이 학교가 고종이 이름을 하사한 「인재를 양성하라」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에서 만나는 학생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이들과 함께 예배를 시작하니, 1887년 10월 9일 주일 창립된 벧엘 예배당(정동제일교회)이다.  

정동제일교회와 아펜젤러를 논할 때 독립운동을 빼고 얘기할 수가 없다. 정동제일교회를 통해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아펜젤러는 서재필이 설립한 독립협회를 돕고 기독 청년운동 단체인 「협성회」를 함께 결성한다. 이승만과 친분이 있어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구금된 이승만과 그 가족을 돌본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정동제일교회 최병헌 목사는 을사늑약 체결을 반대하는 고종의 밀서를 헐버트 선교사를 통해 미국 정부에 전달한다. 33인에 이름을 올린 이필주 목사, 박동완 전도사는 정동제일교회 출신이었다. 

1918년 정동제일교회 예배당에 파이프 오르간이 설치되었다. 파이프 오르간의 서너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송풍구는 윤치호가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유관순이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던 자리이다. 19살 어린 나이에 일제의 모진 고문으로 세상을 떠난 유관순 열사의 장례식 또한 이곳 정동제일교회당에서 거행되었다. 

아펜젤러는 1902년 6월 미 남장로교 선교사 레이놀즈가 주관하는 「성서번역위원회」에 참석차 목포로 배를 타고 가던 중 조난을 당한다. 타고 가던 배와 같은 회사 소속 다른 배와 부딪혀 배가 침몰하자 동승했던 한국인 비서와 어린 한국 소녀를 대피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가 44세의 일기로 순직한다. 아펜젤러는 부인 노벨 아펜젤러, 아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 딸 엘리스 아펜젤러와 함께 양화진에 잠들어 계신다.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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