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나친 금욕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음식에 대한 욕망도 억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끔 푸짐한 식단을 앞에 놓고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분위기를 상상해 보았다. 그렇다고 어린아이처럼 주님께 조를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한겨울철에도 솜이불이 없어서 담요 두 장을 깔고 덮고 잘 때면 온몸 속에 냉기가 감돌아 잠을 설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상상해 보라. 영하 10~15도를 오르내리는 곳에서 가끔씩 연탄 난로까지 꺼지는 날이면 기숙사 콘크리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와 얇은 유리창에서 새어 들어오는 찬 공기로 온몸이 고드름이 되는 듯했다. 나는 꿈에서 푹신한 솜이불 속에서 잠자던 어린 시절을 연상하곤 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이와 같은 청빈과 가난을 통해 주님과 약속하는 무지개 계약(Rainbow Covenant)과 같은 희망찬 미래를 설계해 나갔다. 옛날 노아와 하나님이 맺은 평화의 계약(Shalom Covenant)처럼 나와 주님 사이에 맺어질 여러 가지 재산 관리에 관한 계약도 만들어 보았다.
내가 얻은 수입 중에서 먼저 주님께 드릴 헌금과 또한 봉사해야 할 헌금을 구별해 사용하겠다는 점도 확실히 해두어야만 했다. 어린 시절 구걸 행각을 하면서도 주님께 헌금했듯이 내가 정당한 수익을 얻었을 때는 반드시 선한 청지기의 삶을 실천하리라 정해 놓았던 것이다.
역경 속에서 드린 기도 응답
당시의 신학생들이 구할 수 있는 파트 타임 직업은 여러 가지였다. 한 번은 권세열 교수님이 경영하는 야간 성경 구락부에서 일할 영어 교사를 구한다기에 일차 면접을 본 적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거절당했다. 실력보다는 눈이 안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내 한쪽 눈만이라도 건강하게 해주셨더라면 이와 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나님께 항의하듯이 기도드렸다.
그러나 어떤 역경 속에서 드린 눈물어린 항의 기도일지라도 반드시 그 열매를 맺는다는 확신만은 잃지 않았다. 이렇게 눈물을 닦으면서 울분을 삭여 내는 것도 어느덧 체질처럼 익숙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릴 때 읽었던 요한복음서의 말씀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3-14).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요 15:7).
쓸 것을 채워 주시는 하나님
하루는 나를 평소에 아껴 주시던 도술 목사님이 부르셨다. 그분은 평소에 심한 관절염으로 고생하신 분이었다.
“김선태, 안마 마사지 할 줄 아냐?” 하고 물으셨다.
“예, 할 수 있습니다. 교수님.”
그러자 도 교수님은 일주일에 두어 번씩 자신의 집으로 와서 안마해 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학교 수업이 없는 월요일과 토요일을 택해 후암동에 찾아가서 몇 시간씩 열심히 안마 마사지를 해드렸다. 비록 제대로 배우진 못했지만 성의를 다해 해드린 결과 교수님의 관절염 통증도 많이 가라앉게 되었다.
안마 마사지를 끝내고 나면 으레 사모님은 푸짐한 밥상을 내놓고 먹도록 권하셨다. 오랜만에 먹는 넉넉한 쌀밥과 된장국과 잘 익은 김치는 어떤 산해진미보다도 맛있었다.
여름방학이 가까워져 학비 조달을 위해 고민하고 있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되신 김규당 실천 처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어느 곳에 가든지 여름 동안 봉사를 하면 가을 학기 학비를 마련해 주겠다고 하셨다. 참으로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는 신학교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는 구의동 바디 고아원에서 근무하는 선배를 만나 이 사실을 전했다. 그 친구는 쾌히 승낙해 주었고 언제든지 와서 봉사하라고 했다. 바디 고아원은 고아원과 병원을 겸한 곳이었다.
나는 친구의 허락을 받아 학생들을 가르치고 상담 역할도 맡아 주었다. 저녁마다 함께 찬송을 부르고 성경 말씀을 가르쳤으며 가끔씩 성경 동화도 구연해 주면서 차츰 한 식구가 되었다.
고아원에서 식사도 함께 하고 잠도 같이 잤기 때문에 두 달 동안은 아무런 불편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그곳에서 학생들이 나를 무척 따랐고 나이든 처녀들은 연애 편지까지 보내올 정도로 친숙하게 지내게 되었다. 두 달 후에 받은 사례금으로 한 학기의 학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