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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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현리 선교사 사역, 박화성 작가 문학적 발자취

맹현리 선교사의 사역은 활기가 넘쳤다. 원래 그의 부모는 미국에 유전밭이 있어서 엄청난 석유의 생산으로 부유했다. 그래서 맹현리가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보낸 편지를 받아보고 부모는 직접 선교할 수 있는 보트를 구입해 줬다.

“나는 목포와 나룻배로 연결되는 섬의 24개 마을을 모두 방문했다. 내 새 보트로 군산에서 목포로 가는 여행을 하면서 나는 12개의 섬을 방문했는데, 그 섬들 대부분은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간 곳이었다. 5월에는 새로운 많은 섬을 방문하고, 다른 곳에서도 사역을 격려하느라 바다 위에서 4시간 반을 보낸 일도 있었다. 6월에도 20개로 이뤄진 섬인 진도 근도섬까지 다녔다.” (위의 보고서)

맹현리 선교사의 사역은 놀라웠다. 신안 앞바다와 진도 앞바다, 완도 앞바다는 평온한 봄 날씨에 여름 날씨도 그런 대로 견딜 만하지만, 겨울이나 가을 날씨는 변덕이 심해 폭풍이라도 부는 날이면 견디기 힘든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는 혼자서 사역한 것이 아니었다. 완도에서 만난 최병호가 훌륭한 조사로서 협조해 줬으며, 이미 배유지 선교사 시절 목포에서 도왔던 마서규 조사도 도서 사역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또한 해남 고당교회 출신 정관진도 좋은 협력자가 되어 주었다. 그래서 맹현리 선교사는 이들의 도움으로 신안 앞바다에 있는 비금 덕산교회(1908년)를 비롯해서 대척리교회(1908년), 장고리교회(1915년), 해남 이진교회(1917년), 장흥 지천교회(1919년), 무안 자라리교회(1920년), 해남 의야리교회(1920년), 진도읍교회(1920년) 등을 설립했다.

맹현리 선교사의 가장 큰 공은 목포 진명여학교의 시설 확장이었다. 목포 영흥학교는 미국 스파탄버그에 있는 제일교회의 후원으로 훌륭한 시설을 갖추게 됐다. 이때 맹현리 선교사는 본가에 연락해 지원을 받아 석조건물 2층으로 학교를 신축하고 그 이름을 멕콜리기념학교라 불렀다.

맹현리 선교사는 목포에 우뚝 솟은 석조건물 정명여학교를 놔두고 1930년 부인과 함께 목포를 떠나 미국 고향 땅에 도착했지만 도서 선교에 몸이 많이 허약해진 탓인지 약 한 번 써볼 수 있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도착하자마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여류 작가 박화성과 정명여학교

목포문화원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노적봉을 볏단으로 둘러싸고 적군 일인들에게 군량미가 많이 있는 것처럼 보여 주었던 그 노적봉 아래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아래층은 목포문화원으로 사용되고, 2층은 정명여학교가 낳은 여류 작가 박화성 문학기념관이다. 그리 넓지 않지만 2층 전체 홀을 한 여인의 기념관으로 만든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2층 입구에 들어서면 그가 즐겨 사용했던 다리 없는 책상과 방석이 있으며 그 옆에는 그의 종교와 신앙심을 보여 주는 찬송가 책이 놓여 있다. 찬송가의 표지를 보면 합동찬송가를 생각나게 하는데 책상 위의 찬송가로 보아 그가 그만큼 많은 찬송시에서 작품을 찾아내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찬송을 부르면서 작품을 쓰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떠오른다. 기념관 중앙에는 친히 원고에 ‘木浦의 讚歌’를 작사한 시 한 편이 놓여 있는데, 모든 순례자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木花꽃 송이송이 무궁화 되어

나라의 꽃으로 삼천리에 피네

뿌리는 西南의 끝 木浦에 내리고

잎새들 날아서 다도해 되었네

육지도 열리고 바다도 열린

내고향 木浦는 文化의 선구자

알차게 뻗어 나갈 未來를 向해

나가자 더 나가자 힘차게 더 힘차게.

이러한 시를 발표한 박화성(1904~1988)은 목포시 죽동에서 아버지 박운서와 어머니 김운선 사이에서 4남매 중 막내딸로 출생했다. 선교사 스트레퍼가 설립한 정명여학교에 입학해 몇 차례 월반하면서 그의 실력은 목포 시내 작은 마을에까지 알려지게 됐다.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감수성이 예민한 박화성은 철저한 신앙교육을 통해서 신‧구약성서를 통달했으며, 여기서 배운 성서 지식이 훗날 작가로서 대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했다.

더욱이 11세밖에 안 된 박화성은 ‘유랑의 소녀’라는 작문을 썼는데 이때 필명을 화성이라고 할 만큼 문학에 대한 강한 집념을 갖고 있었다. 신앙의 교육을 잘 받은 박화성은 정든 교정을 떠나 상경해 숙명여학교 고등과에 진학했으며, 이 학교를 졸업한 후 고향 가까운 전남 영광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곳에서 시조의 대가 조운을 만나 문학수업을 받기 시작했으며, 1925년에는 단편 ‘秋夕前夜’가 이광수의 추천으로 조선문단에 등단하게 됐다. 그는 도일해 동경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해 수료한 후 귀국해서 ‘白花’, ‘下水道工事’ 등을 발표하면서 소설가로 변신했다.

일제 말기에 그들이 전국민을 동원해 친일행각에 앞장서도록 강요할 때 박화성은 단연 필봉을 꺾어 버리고 고향 목포에서 후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가 이러한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1930년대에 온갖 방법으로 한국인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이때 박화성은 작품을 통해 일제의 혹독한 식민지 생활에서 고생하는 민초들의 삶을 그렸으며, 더욱이 농민 노동자의 그 처참한 환경을 집중적으로 작품에 담았다. 이들의 가슴 아픈 삶을 지켜 본 박화성은 희망과 용기를 블어넣어 주면서 새로운 삶이 우리 앞에 전개된다는 종말론적 미래를 심어 주기도 했다.

특별히 그는 나주 지방에 머물면서 나주 지방의 초대 교회의 하나인 광암교회에 출석했다. 그때 나주 들녘에는 3년째 비가 오지 않음으로 인해 나주의 농민들은 비참한 형편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사람들이 모여 기우제를 올린다면서 많은 사람들이 떡과 술 등 여러 가지 음식물을 준비하고 산으로 올라갔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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