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일이다. 나는 대학교 재직 중 교직 과정 이수 학생들이 4학년 때 1개월간 중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가는 일을 돕고 있었다. 1년에 500명이 넘는 학생들을 100여 개 이상의 학교로 배치했으니 각 학교를 순방하면서 현지 적응의 지도와 실습생 지도를 해주는 학교에 인사차 방문을 하곤 했다. 그때 어느 중학교의 2학년 교실에서 ‘염치를 알자’는 급훈(級訓)을 보고 좀 이색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는 주로 ‘근면’, ‘성실’, ‘정직’ 등의 도덕적 덕목을 많이 쓸 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살아갈수록 그 급훈의 중요성과 실효성을 절감하게 된다. 중국 후한 시대 양진(楊震)의 사지(四知) 즉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네가 알고, 내가 안다”(天知, 地知, 子知, 我知)의 고사도 바로 염치를 알아야 한다(수치심의 중요성)는 교훈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후한(後漢) 왕조는 창건한 지 100년이 지난 2세기 초부터 환관과 외척들이 권력을 장악한 뒤 전횡을 일삼아 정치가 매우 문란해졌다.(비선실세가 옛날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결하고 강직한 정치가로서 주목을 받은 사람이 양진(楊震)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로서 이름을 날렸는데 50대에 들어 뒤늦게 벼슬길에 올라 나중에는 재상과 동급지위인 삼공(三公)에까지 올랐다. 양진이 동래(東萊)의 태수(太守)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던 때의 일이다. 창읍이란 곳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는데 이 고을의 현령(기관장)을 맡고 있던 왕밀(王密)이 야간 방문을 왔다. 양진이 전에 왕밀을 어떤 관직에 추천했던 인연이 있어서 두 사람은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왕밀은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인사를 나눈 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품에서 황금 10근의 상자를 꺼내어 양진에게 내밀었다. “이것이 무엇인고?” “태수 어른께 드리는 제 성의입니다. 부디 받아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양진은 엄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을 추천했던 만큼 당신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당신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는 모양이오. 이렇게 뇌물을 가지고 온 것은 어쩐 일이요?” “밤중이라 이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안심하고 받아주십시오. 아무도 모릅니다.” 왕밀은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황금을 양진에게 주려고 거듭 금을 들이 밀었다. 그러자 왕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양진은 무서운 목소리로 왕밀을 질책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거요.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당신이 알고, 내가 알고 있는데 어찌 아무도 모른다고 말하시오.”(天知, 地知, 子知, 我知, 何爲無知) 왕밀은 부끄럽고 두려운 나머지 몸을 움츠리고 허둥지둥 물러갔다. 그 후 양진은 삼공의 한 사람이 되어 기강을 바로잡고 부정을 엄단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러나 환관들이 공모해 모함을 하는 바람에 곧 파직당하고 말았다. 그는 힘이 없는 자신의 신세에 한탄을 하다가 분노를 못 참아 독약을 마시고 자결했다. 양진이 묻힌 묘 앞에 어느 날 큰 새가 날아와 하늘을 쳐다보며 슬픈 듯 눈물을 흘린 후 날아갔다고 한다. 고려 시대 최영 장군의 교훈에 “황금을 볼 때 돌같이 보라”고 했다. 그러나 21세기 문명사회에 비밀이 없는 이 대명천지에도 후진국형 비리 축재 등 돈에 관한 정직하지 못한 범죄가 계속되고 있고 이제는 철면피를 넘어 권력으로 범죄자를 비호하고 편들어 주고 있으니 이게 어찌 세계 10위권 국가의 모습이라 할 수 있겠나? 뇌물 공여, 부정청탁 등 각종 인허가 등 이권 주변에는 항상 돈의 유혹이 넘실거린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들에게 마음의 법정(양심)을 주셨기에 이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본인이 제일 먼저 알 것이다. 아무리 변명하고 감싸주어도 본인 자신이 일평생 손톱 밑의 가시처럼 양심의 찔림을 느끼며 살 것이다. 남은 그렇다 치고 어찌 그런 비리, 불법을 저지른 후에 배우자와 아들딸, 며느리와 사위, 그리고 사돈을 볼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은 명예가 생명인데 그 더러운 오명을 평생 자기 이름 앞에 수식어로 달고서 어떻게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고 길을 걸어갈 수 있단 말인가. ‘염치를 알자’가 이렇게 중요한 교훈이었다.
김형태 박사
<더드림교회•한남대 14-15대 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