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가 되는 처음의 과정인 보은의 성경고등학교 졸업 이후 기독교에 대한 신앙심이 더욱 깊어진 나는 자연히 최종 목표인 대전신학 대학에 진학했다. 또 다른 장고는 필요 없었다. 나의 애칭인 별명 ‘독일병정’은 아마 이때부터 탄생한 것 같다. 무엇을 하려고 할 때는 매우 신중하게 면밀히 생각을 거듭하는 성격이지만 한번 결정하면 초지일관 밀어붙여 끝을 보고야 마는 성품인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현안에 대해서는 이른바 충청도 기질처럼 오래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며 나름대로 모든 상황을 시간을 충분히 할애하면서도 검토하는 습관이지만 어떤 마음안의 판단이 섰을 때는 앞뒤 돌아보지 않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라 이제 ‘독일병정’이란 나의 별명은 어느덧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여기서 하나 언급하자면 나의 경우는 늘 모든 일에 객관적 상황과 주관적 상황을 동시에 보려는 성질이 있다. 마치 저울의 정평처럼 기울기로 모범답안과 정답을 얻는 것처럼 그래서 그런지 나의 이런 모습은 다행히도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중 큰 실패나 역경 없이 나를 있게 한 근본원인이 되고 있어 참으로 스스로도 감격하고 있다.
대전의 신학대학으로의 유학은 내게 커다란 인생 전환점이 되었다. 목사로서의 미래는 결정되었지만 한참 혈기왕성한 젊음으로서의 미래관과 또 다른 성취욕, 그리고 학구열에 대한 열정 등이 새로 운 면모로 다가왔다.
한동안 부모님과 형제들과 떨어져 있으려니 마음의 안정에서 비롯되는 정서로 우울처럼 가끔 오는 노스탤지어는 어쩔 수 없었다. 눈에 아른대는 고향산천과 사철 변하는 숲과 나무들을 보며 보내던 소싯적 시절, 그리고 아무런 생각 없이 또래들과 하루를 뛰놀며 저녁 어스름 때야 집으로 들어와 새벽까지 학습하던 습관들이 한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아 새벽녘까지 잠을 뒤척이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전신학대학으로의 유학은 내게 크나큰 인생 전환점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목사 이외의 다른 인생길은 전혀 생각 하지 않고 있었다.
대전이란 큰 도시에서 각기 다양한 직업들을 가지고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맞게 성공한 많은 분들의 보람과, 각기 또다른 삶과 생활 을, 인성과 또 다른 미래를 위해 어떤 가치관을 공유하며 나름대로 행복해 보이는 모습들을 보며 내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어떤 이해관계와 인생을 관조하는 마음의 또 다른 길이 내 마음 안을 조금씩 장식하고 있었다. 즐비한 수목들에 둘러싸인 조경이 좋은 신학대학은 대부분 충청도 각 곳에서 모인 예비 목사들로, 자연 한마음 한뜻으로서의 새내기 예비 목사들이 목적이었으므로 분위기는 참으로 좋았다.
일반적인 교양과목 외에 주로 기독 교리와 성경 공부로 내실을 다 하는 한편 성경말씀 안에 깃든 여러 내용적 의미를 비교분석 연구하는 한편 장래의 목사로서의 인성교육과 인격 수련에 중점을 둔 참으로 유익한 공부도 많았다.
가끔은 기독교인이라면 이름만 대도 누구나 알만한 유명 목사님들의 초빙강의도 들으며, 나는 언제 어디서나 좀더 남보다 앞서 가겠다는 마음으로 하루가 가고 또 다른 한 달을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동기간에는 훌륭한 목사가 되기 위한 하나의 미래의 희망 의식을 갖고 공부하다 보니 서로가 형제처럼 편안하게 친숙해져 갔다.
같은 답안을 놓고 설교를 듣고 이론을 바탕으로 한 토론과 질의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현장 학습은 참으로 유익했다. 같은 성경구절을 갖고 소화하는 과정에서 모두들 깊이와 높이와 넓이가 다른 결과론이 도출되는 것을 보고 나는 스스로 놀라기도 했다.
이를테면 살아온 과정이나 성품, 생활환경, 그리고 현재의 입지나 환경적 영향 등에서 가시적으로 도출되지 않는 서로의 차별점을 서서히 발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의 확고부동한 기독교리 앞에서도 그것도 모두들 신앙적 뿌리를 같이한 장래의 목표가 확실한 목사를 지향하는 배움의 과정에서 파생되는 이 작은 이유는 또다시 나의 미래를 유추해 보는 새로운 계기로 작용한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의 작은 행성의 지구 안에서도 너무나 크고 넓은 오묘한 이치와 자연이 더불어 함께하며 낯선 영역 안에서 선택할 무수한 존재감을 새로이 발견한 것이다.
높은 경륜의 목사님들의 강론이나 설교를 들을 때마다 내가 한없이 초라하고 작게만 보이는 대신 이 세상에서 내가 해야할 일이 목사 가 전부이며 내 성격과 미래의 희망이 과연 일치하며 이것이 내 생애의 전부인가. 내가 이 세상을 영위하는 동안 목사 이외에 또 다른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없는가 하는 내 안의 수없는 질문이 끝없이 생성되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급기야는 현재의 나와 미래를 투시하는 또다른 내가 다시 한번 목사의 길을 진부하게 자문자답하는 시간으로 하루를 보내는 날이 많아진 것이다.
어떤 때는 몇날 며칠을 잠을 설치며 스스로 물어보고 그 해답을 얻고자 하는 번민의 날들이 늘어만 간 것이다. 그러나 결코 이 해답은 누구와 상의해서가 아닌 나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는 데는 의의가 없었다.
이런 가운데 어느덧 감미로운 봄의 계절이 가고 여름이 마악 시작할 무렵 병무청으로부터 입영통지서를 받은 것이다. 1962년 6월 25 일 오후 4시까지 논산 육군훈련소로 입소하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이 될 시간과 기회가 또 다른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입영통지서 이후 나는 대전신학대학교를 중퇴하는 계기가 된 것을 머나먼 후에야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양한석 장로
• 문현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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