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유․기적으로 유명했던 부흥사 김익두 목사
논란 속에 고비 맞은 김익두 목사의 부흥운동
당시 김익두는 ‘신유와 기적을 수반한 부흥운동’을 주도하면서 ‘벙어리가 말하고, 앉은뱅이가 걷고, 17년 된 혈루증 환자가 쾌유되며, 소경이 눈을 뜨는’(마 11:5) 이적을 일으킨 인물로 소문이 났다.
김익두 목사를 초빙해 평양 지역에서도 특별부흥회를 개최했는데 시내 일곱 교회의 교인들이 크게 감동되어 금전과 비녀, 반지 등으로 6만 원을 연보했으며, 많은 병자에게 안수해서 치료를 받은 사람이 많았다. 김익두 목사는 길선주 목사의 1907년 대부흥운동의 뒤를 이어 1919년부터 부흥사로서 큰 성과를 올렸으며, 그 뒤를 이은 사람이 이성봉 목사였다.
1920년 9월에 부산진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김낙언의 아들 김두수가 태어나서 8개월 만에 앉은뱅이가 되어 8년을 지나오다가 김익두 목사가 부흥회를 인도한다는 소문을 듣고 아버지와 함께 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강대상 바로 밑에까지 기어나가 앉았다. 이를 본 김익두 목사의 마음에 불쌍한 마음이 있어 안수기도하고 손을 잡아 일으키니 즉시 걷게 되어 온 교회가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이와 같은 이적은 많이 일어났다. 4년 된 다리 병이 완쾌되는가 하면, 18년 된 혈루증이 깨끗이 낫고, 소경이 눈을 뜨고 곱사등이 펴졌다. 이러한 이적의 소문이 퍼져 그가 집회를 열면 각처에서 수백 명씩 병자들이 몰려들었다.
그 당시 <기독신보>는 김익두 목사의 이적을 대서특필하며 예수 이후 2천 년 뒤에 이러한 기사가 나타났음을 크게 보도해 세계교회가 떠들썩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김익두 목사가 미신을 가르친다고 했으며, 좋지 않은 평이 있었다.
김익두 목사는 이러한 사태를 주시하면서 자기의 병 고치는 일 때문에 사회에 물의가 일어나고 교회 안에 의견충돌이 생긴다면 덕스럽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그리하여 그는 병 고치기 위한 기도를 조심했고, 이후로 그 수를 극히 제한했다.
그의 이적을 비판하는 사람들, 즉 황해도 재령의 임택권 목사는 1919년 ‘이적증명회’를 발기해 3년 동안 김익두 목사를 통해 치유 받은 자들의 신상과 기록을 사진과 함께 정리해 1921년 1월에 《조선예수교회 이적 명증》이라는 책자로 발간했다.
또한 황해노회(黃海老會)는 1922년 장로회 총회에 헌의하기를, 장로회 헌법 정치 3장 1조에 “금일에는 이적 권능이 정지되었느니라” 조항을 수정할 것을 헌의했는데 총회는 이 안건을 신경과 성경 진리에 위반되는 조건이 아닌즉 개정할 필요가 없다고 결의하고 각 노회에 회부했는데 그 결과는 부결되었다. 이 일로 김익두 목사의 신유 부흥집회는 고비를 맞게 되었다.
한편, 기독교가 제국주의의 수족이요, 자본주의의 주구로서 일제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반기독교 운동을 벌이던 사회주의자들은 김익두 등의 부흥사들을 “고등 무당”이라고 비난했다. 1922년 5월 9일 <동아일보>는 김익두의 부흥회가 십자가의 정신을 체현하는 것보다 미설 기적(迷說 奇蹟)을 추구한다고 비판하는 사설을 썼다.
팽배되어 가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세력은 김익두 목사가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확대해 가는 것을 용인할 수가 없었다. 1926년 2월 25일 이민 교포들이 많이 사는 만주국 간도 용정교회에서 부흥회가 열렸을 때, 간도 각지에서 모여든 반기독교 청년들이 인산인해를 이뤄 부흥회가 열린 교회당을 포위하고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방해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