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 나의 일생] 선교 140주년 선교유산  탐방 : 태화관 이야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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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화관 이야기를 하려면 월슨(Thomas Woodrow Wilson)의 민족자결주의 영향으로 촉발된 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을 먼저 이야기해야 한다. 독립선언문을 선포하고 3.1만세운동을 시작하는 일은 전국에서 사람들이 집결할 고종의 인산일(因山日) 3월 3일로 잡혀 있었다. 인산일에 큰 소요가 일어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의견이 모아져 하루 앞당겨 3월 2일에 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날은 공교롭게도 주일인지라 33인의 절대다수(16명)를 차지하고 있던 기독교인들이 일제히 반대를 해 또 하루를 앞당긴 토요일 3월 1일로 정해지게 된 것이다. 

3.1운동이 신앙운동, 기독교운동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3인들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재판과 심문과정에서 한결같이 3.1운동에 참여한 이유를 신앙적인 이유에서 찾고 있다. “그대들이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운동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인가?” 라고 재판관이 물을 때, 

– 이승훈 장로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이다.”

– 남산현교회 신흥식 목사는 “민족자결주의는 하나님의 뜻이다.”

– 의주에서 온 유여대 목사는 “하나님의 명령이다.”

– 서울 중앙교회 김창준 전도사는 “이는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뜻이다”라고들 대답했다.

33인 중 마지막에 사인한 수표교교회 신석구 목사는 누구보다 깊은 고뇌의 시간을 가졌다. 첫째 목사가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둘째 그리스도인이 천도교 등 타종교와 함께 일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밤낮 기도하던 중 그는 2월 27일 새벽 똑똑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노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민족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게 작은 죄더냐? 네 땅을 찾고자 힘쓰지 않으면 더 큰 죄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는 결단을 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내가 독립운동을 하다 죽으면 수천 수만의 사람들 가슴에 독립정신과 열망이 심겨질 것이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내 자식 삼남매 가슴엔 내 아버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하다 죽었노라 기억할테니 그것으로 족하도다.” 감옥생활을 기록하면서 신석구 목사는 “40여 년 신앙생활 중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감옥에 갇혀 있던 짧은 5개월이 내 생애 최고 기쁨의 시간이었다”고 술회한다. 

독립선언문 선포는 탑골공원(탑이 있는 공원, Pagoda Park)에서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실외 공원에서 선언하게 되면 폭동이 일어날 수 있다고 발언한 박희도의 말을 받아 손병희가 자신의 단골식당 태화관으로 제안했다. 그리하여 팔각정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사람은 33인 중 한 사람이 아니라 경신학교 출신 청년 정재용이었다. 그의 낭독이 끝나자 만세가 시작되고 태극기가 휘날리며 시위행렬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무저항적이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나라 잃은 서러움에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3.1운동의 발상지 파고다 공원을 찾곤 했다. 

33인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선포한 곳은 태화관 뒤뜰 ‘별유천지 6호실’ 식당 방이었다. 현재 종로구 인사동 194번지 12층 태화빌딩이 서 있는 그 자리이다.

<다음편에 계속>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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