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반대는 기억이다. 기억은 지난날에 보고 들었던 것을 다시 소생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혼이 기억력이 밝다는 것은 머리가 좋다는 의미다. 옛날에는 세 살 난 아이가 천자문을 떼었다 해 천재라 불렸고, 얼마 전만 하더라도 네다섯 살 된 어린이가 수학의 미적분에 능통하다든가 영어기능이 뛰어나 초등학생 나이인데도 대학에 입학했다 해 신동이라 여겨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러던 것이 컴퓨터 시대에 이르고 보니 그 뛰어난 기억력이 빛을 잃어버린 듯 천재니, 신동이니 하는 말들을 요즘 들어보지 못했다.
“천재란 노력과 인내에 대한 크나큰 자질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뷔퐁’은 말을 했고 ‘키케로’는 그의 저서인 「웅변론」에서 “기억은 모든 사물의 보배이며 수호자다”라고 했다. 그렇다. 기억이 뛰어나기에 큰 자질이라 여겨 왔고, 그 자질은 노력에서 얻어진 인내일 뿐이지 더 이상은 아니다. 그리고 기억은 살아 있는 생물체의 소산이지 컴퓨터와 같이 고정으로 기억을 입력시킨 기계장치는 아니다.
컴퓨터는 기계라서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고정화된 데이터(data)를 담고 있을 뿐 변동은 전혀 없다. 그러나 기억은 인간의 사고 작용인 두뇌 기능이라서 항상 생동한다. 어떻게 하면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해 가치 있는 삶을 열어갈 것인가.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개척할 것인가를 관망해볼 수 있는 여유가 있다. 이 과정이야말로 미래를 여는 길이다. 인간 뇌리의 기억력은 이같이 비교할 수 없으리만큼 월등하게 우수하다.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컴퓨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당장은 편리해서 좋기는 하나 그 가치는 고정이 되어 변화가 없기에 그대로 머무는 것이다. 그 하나의 예를 보자. 과학은 출발하면서부터 인류에게 유토피아를 안겨주겠다고 호언했다. 그런데도 과학만능을 이룬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외적으로는 천지가 개벽했으리만큼 놀랍게 변화한 것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내적인 우리의 삶은 인간의 일자리를 모조리 빼앗아가는 실정이라서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현실을 시급히 극복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원하고 바랐던 의사와 법관의 일자리가 과학의 발달로 우리의 삶이 얼마만큼 침범 당하고 있는가. 의사의 일자리는 로봇에게 수술부터 야금야금 빼앗기고 있고 법조계의 판사직 역시 로봇이 담당할 날이 머지않았다. 심지어는 음식을 만들고 나르는 일까지 척척 해내고 있으니 앞으로 우리의 일자리가 어떻게 주어질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지 않는 한 인간에게 안겨줄 이상세계는 요원하지 않을까.
최근 미국 엘에이(LA)산불은 과학의 힘으로 끌 수 없어 일주일 채 계속 타오르는 불길을 TV를 통해 봤다. 근처 마을 전체를 휩쓸어 초토화시킨 모습, 너무도 처절한 주민의 삶이었다. 이 같은 재난을 극복할 수 있는 과학의 능력은 없을까. 이것이 이상세계를 일으키는 힘이다.
나는 언제부터인지 분명히 말할 수 없으나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직전에 매일같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모든 일을 망각의 피언으로 돌리고 오늘 밤만은 편안하게 잠들게 하소서” 간절한 기도는 무엇을 의미할까. 그러면서도 망각이 짙어진다 해 병원을 찾아가는 나의 모순된 심리, 이 같은 삶은 또 무엇을 의미할까. 오늘의 현실이 얼마나 복잡다단한가를 입증해주고 있지 않을까.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 은퇴
수필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