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영흥학교와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
끝내 비가 오지 않자 그들은 교회당에 몰려와 교회 때문에 산신령이 노여워해서 비를 주지 않는다고 교회에 강한 항의를 제기하면서 행패를 부렸다. 이 광경을 본 교인들은 조금도 대항하지 않고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런데 그들이 물러간 지 얼마 안 되어 비가 내려 그 해 농사를 잘 짓게 되었다. 이 이야기를 소설화한 작품이 ‘한계’이다. 박화성의 소설 중에 가장 기독교적인 냄새를 풍기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목포는 민족운동의 요람지
이미 앞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1902년에 미션학교인 정명여학교가 설립되고 그 다음 해인 1903년에 배유지 선교사에 의해서 영흥학교가 설립되면서 전남 서남 지방이 민족 교육의 장이 되었다. 여기서 수많은 청소년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학업에 열중했다.
그러나 정명여학교나 영흥학교는 일제의 심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교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한반도의 젊은 청소년의 신앙을 키워 왔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들도 모두 철수해야 했으며, 두 학교는 적국의 재산이라 해 일제가 강제로 강매 처리를 해버렸다. 물론 선교사들의 주택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983년 뜻하지 않게 정명여자중학교에서는 선교사의 주택 천장을 수리하던 중에 3‧1운동 독립선언서와 2‧8독립운동선언서, 독립운동가가 발견됐다. 이것들은 학교 당국과 목포시청 당국자들이 3‧1운동을 연구하는 데 귀한 자료가 됐으며, 목포의 3‧1운동의 요람지가 바로 정명여자중‧고등학교였다는 사실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목포 영흥학교와 남궁혁
목포 영흥학교는 1903년 배유지 선교사의 사랑채에서 몇 명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출발했다. 이미 목포선교부의 선교사들은 목포를 중심으로 인근에 있는 무안, 함평, 영암, 해남, 진도, 완도, 강진, 장흥 지방을 순회할 때마다 학교 개설을 요구했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몇 달 동안 학교 설립을 요구해왔으며, 그들은 학교 개설 시기가 곧 올 것을 믿고 있었다. 우리도 이미 학교 사역을 할 수 있는 건물을 확보하고 있으나 만약 학교 사역을 담당할 사람이 없다면, 지금 나의 개인적인 조력자 변창연 형제가 그 일을 담당할 수 있고, 동시에 전도사역에서 뿐만 아니라 소녀들을 위한 학교도 담당할 수 있으며, 특히 내가 다른 시골 지역에 대한 사역으로 인한 부재중에 학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다.” (1903년, 배유지, 미국 남장로교 선교보고서)
배유지 선교사나 오원 선교사는 목포에 근대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데 많은 관심을 갖고 이 근대교육의 요람지가 목포 영흥학교가 될 것을 믿고 이 학교를 위해서 많은 기도를 했다. 그리고 좋은 교사를 확보하는 데 성공을 했다.
목포가 개항됨에 따라 외국인의 출입이 빈번해졌다. 목포가 개항되자 인천세관에서 세관업무를 맡고 있던 남궁혁은 목포세관으로 발령을 받아 내려왔다.
남궁혁은 원래 서울 태생으로 부모의 권유를 받고 배재학당에서 수학했다. 배재학당은 1885년 6월에 미국 감리교회 아펜젤러 선교사에 의해 정동에 설립된 학당이다. 이때 서울 장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배재학당에 가면 서양학문을 터득할 수 있다는 소문이 나있었다. 남궁혁은 이 시기에 배재학당에서 서양 학문과 영어를 터득했고 그 학교를 졸업하자 곧 인천세관의 세관으로 취직했다.
목포로 발령을 받은 그는 목포에서 활동하게 됐는데, 자신이 배운 영어를 활용해야 한다면서 스스로 목포교회에 출석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유지 선교사를 접하게 됐다. 그동안 배유지 선교사는 남궁혁에게 몇 차례 영흥학교의 영어 교사로 일해줄 것을 권유했지만 남궁혁은 자신의 현재 직장에 만족하고 있어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후 배유지 선교사는 목포를 떠나 광주로 이거하게 됐다.
우리는 232명의 학생들이 속해 있는 8개의 학교를 지원했지만 목포 밖에서는 실제적인 교육상의 진전이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적어도 이곳에서는 진전이 주목할 만하다. 마침내 우리도 훌륭한 서양학문을 배운 교사인 남궁혁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좋은 공무원직을 사임하고 4월 1일 우리에게로 왔었다.“ (1908년 9월 17~28일, 변요한, 미국 남장로교 선교보고서)
당시 목포 지방에는 교회가 설립되면 교회에서 남녀 청소년을 모아 놓고 교육을 실시했다. 그래서 목포 영흥학교는 해가 갈수록 많은 학생들이 스스로 모여들었다. 더욱이 남궁혁과 같이 훌륭한 교사가 영흥학교에 있다는 것은 큰 자랑거리였다.
다행히 영흥학교에서는 변요한 선교사의 협력으로 미국 남장로교 총회에 속한 스파탄버그에 있는 제일교회에서 새 건물을 건축해 주기로 약속을 받았다. 그래서 변요한 선교사는 목포교회 교인들의 도움으로 인부를 동원해서 산정동에 있는 돌산에서 채취한 돌로 산뜻한 건물을 완성하고, 제일교회 당회장 존 화킨스 목사의 이름대로 ‘목포 와킨스중학교’라 부르게 됐다.
영흥 출신들의 민족‧민중운동
목포 지방에 새로운 명문 와킨스중학교가 자리를 잡자 군산 영명학교 보통과 출신들이 목포까지 오는 일이 생겨났다. 이중 문용기라는 학생은 익산 출신이지만 학교가 새롭게 건축되고 유능한 교사가 있다 해 그 머나먼 목포에까지 와 와킨스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와킨스중학교에 다니면서 채플시간과 성경시간에 남달리 관심을 갖고 열중했으며, 4년 과정을 마치고 제1회로 와킨스중학교를 졸업하고 자신의 모교인 군산 영명학교 수학교사로 취직했다. 문용기는 남달리 민족애가 강했으며, 언젠가는 우리나라가 일제로부터 독립해야 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3‧1독립운동이 전개됐으며, 군산과 전주에서도 3‧1독립운동이 전개됐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