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산책] “내려갈 때 보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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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날 노벨문학상 후보 명단에 여러 차례 오르내리던 우리나라의 고은(高銀, 1933~ ) 시인이 쓴 시 중에 모두 열다섯 글자로 된 아주 짧은 시가 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ㅡ이 시는 “순간의 꽃”이라는 시집에 담긴 시인데 제목이 따로 없고 편의상 “그 꽃”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시이다. 이 시는 “열다섯 글자”가 전부이다. 

이 시를 무심코 읽어보면 아주 평범한 내용이지만 그 내용을 자세히 음미해보면 시인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심장한 간증적인 고백이 들어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짧은 ‘석줄, 열다섯 글자’ 속에 들어있는 응축(凝縮)된 의미가 참으로 놀랍다. 뿐만 아니라,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을 내려올 때 보았다”는 고은 시인의 고백이 우리의 마음에 어떤 울림을 준다. 

이 시에서 고은 시인이 표현한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의 시간적 개념을 인생의 시간과 비유한다면 ‘올라갈 때’란 삶의 의욕이 왕성해서 열심히 일하던 ‘청장년기(靑壯年期)’로 볼 수 있을 것이고 ‘내려갈 때’란 인생의 하강곡선(下降曲線)을 그리는 ‘노년기(老年期)’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정상(頂上)을 향해 앞만 바라보고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우리가 정작 주변 길섶의 소중한 것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치게 마련이다. 올라갈 때 정신없이 앞만 보고 걷느라 무심코 지나쳤던 것을 같은 길로 내려오면서 보게 되는 사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올라갈 때 걸어갔던 같은 길을 걸어 내려오면서 시야에 들어온 바위가 그렇게 아름다운 줄 오를 때는 미처 볼 수 없었다. 곱게 물든 단풍잎이 그렇게 고운 줄 알지 못했다. 나뭇가지에서 재롱을 떠는 다람쥐 한 마리가, 또 길섶에 핀 한 송이 야생화가 그렇게 귀엽고 예쁜 줄 눈치 채지 못했었다. 그래도 한 가지 감사한 것은 비록 올라갈 때는 못 보았지만 내려올 때 보게 된 것만도 이 얼마나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인가! 내려올 때조차도 허둥대느라 끝내 길섶 주변의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을 것이므로.

고은 선생의 짧은 이 한 편의 시가 정말로 맘에 드는 것은 시의 내용이 쉬워서 좋고 시의 길이가 짧아서 더욱 좋다. 또 시가 외우기 쉽고 그 시가 주는 의미가 매우 교훈적이어서 늘그막에 인생의 여정을 걸어가는 우리네들에게 성찰(省察)의 기회를 제공해 주니 더더욱 좋다.

한 젊고 유능한 청년사업가가 고급 승용차를 몰고 가는데 갑자기 돌멩이가 날아와서 그의 차의 문짝을 때려 문짝이 상처를 입게 되었다. 옆을 보니 어린 소년이 있었다. 화가 난 청년은 차에서 내려 돌멩이를 던진 소년의 멱살을 잡고 “아니, 이 녀석! 이게 무슨 짓이냐? 변상을 받아야겠다. 너희 부모님께 가자”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소년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제가 돌멩이를 던지지 않았다면 아무도 차를 세워주지 않았을 거예요. 저기 우리 형이 윌체어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그랬어요. 나의 힘으로는 꼼짝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청년사업가는 목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 아무 말 없이 소년의 형의 쓰러진 윌체어를 바로 세워주었다. 청년사업가는 그 후로도 자신의 상처 난 자동차를 수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상처가 난 차를 볼 때마다 “자신을 향해서 도움을 요청해오는 사람을 외면하지 말자”는 다짐을 하곤 했다. 앞만 바라보고 너무 빨리 달려가면 주변을 볼 수가 없게 마련이다. 

인생은 청년기보다 노년기가 더 아름다워야 한다. 최근에 작고한 前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Jimmy Carter, 1924~2024)가 칠순(七旬)을 맞았을 때, 어느 기자가 물었다. “당신은 ‘농장 경영인’에서 ‘백악관 주인’이 되기까지 흥미진진하고 도전적인 인생을 살았는데 그 중 최고의 시기가 언제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카터는 이 질문에 “바로 지금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농장을 경영하던 젊은 시절보다도, 대통령으로 봉사하던 53세~57세 때보다도, 은퇴하고 70이 된 지금 자기는 인생의 최고의 시기를 살고 있다는 뜻이었다. 맞는 말씀이다. 노년기란 과거만 회상하며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남겨진 시간을 지루하게 보내는 기간이 아니다. 나름대로 자신의 인생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시간으로 가꾸어 가면서 남은 시간을 정리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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