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 열 명이 모인 자리에 가면 나를 이상하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두세 명 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한두 명 있다고 합니다. 꼭 어떤 법칙처럼 그렇다고 합니다. 지금 잠시 눈을 감고 호흡을 길고 고요하게 하며 차분히 생각해 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고 그 사람들과 즐거웠던 순간들을 떠올립니다. 의도하지 않아도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고 미소가 지어지는 것이 느껴집니다. ‘그래, 내가 이 사람을 이래서 좋아하지’ 하며 문득 그에 대한 고마움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예전에 다퉜거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내가 믿음을 주었지만 나를 배신했거나, 가치관이 달라서 스트레스를 받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 명명백백한 이유가 있는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해 봅니다. 누가 봐도 이 사람은 미워할 만한 사람인지, 내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가 그를 싫어하는지도 생각해 봅니다. 나는 그 사람이 싫은데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그 사람을 좋아한다면 미움의 근거가 그의 쪽이 아니라 내 쪽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 마음이 불편해서, 혹은 누군가 그 사람이 별로라고 나에게 말해서, 기타 등등 여러 가지 확실하지 않은 이유 때문에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다시 말해 내 미움의 기준을, 좋고 싫음의 기준을 깊이 묵상하고 이것이 진정 옳은 기준인지를 고찰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 시간은 그동안의 내 삶의 세월을 성찰함으로 나 자신을 지금보다 더 성숙한 나로 만들어줄 것입니다.
그리고 미움의 이유가 세상의 이유인지 하나님의 이유인지도 구분해 봅시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행 9:4-5)
잘 아시는 것처럼 사울은 예수님을 믿고 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해 잡아갔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의 순교 자리에도 있었으며 그의 순교를 마땅하다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울에게는 그것이 옳은 기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그가 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크게 엎드러집니다. 그리고 사흘간 과거의 가치관과 너무도 다른 일이 벌어진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치열하게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동안의 기준이 무너지고 새로운 기준을 쌓아 올린 시간이 됐을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며 충분히 흔들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미움과 시기 질투가 마음에 가득 차오를 때도 많습니다. 그때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날을 소망하며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박남을 장로
<부산노회 장로회장, 대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