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척 추운 겨울날 마포삼열(미국이름: 마팻) 교수님댁을 찾아가 어려운 형편을 말씀 드리고 저녁 무렵 500원의 생활비를 얻어왔다. 학교 가게 앞에 가서 푸짐하게 생필품과 먹을 것을 사려고 서 있을 때 강형길 형제가 와서 정장복 친구가 모친상을 입었으니 조의금을 내라고 했다. 나는 200원을 내준다는 것이 그만 300원을 꺼내 주고 말았다. 다시 100원을 돌려 달라기에는 쑥스러워 남은 돈 200원으로 그 날의 장보기를 끝내야만 했다.
몇몇 친구들과 학교 가까이 있던 그 친구 집에 가서 이틀 밤을 지새고 함께 팥죽도 쑤어 먹으면서 위로하던 일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여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사람 복을 타고난 것 같다. 지금까지 수많은 선후배, 동료 목회자들과 수천 명의 형제 자매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 속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 나에게 큰 꿈을 심어 준 친구도 있었다. 지금은 미국 시카고에 있는 참길장로교회의 목사로 있는 강형길 박사다. 그 당시 그는 내게 미국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꿈을 심어 주었다.
나는 미국 유학의 길을 생각할 형편이 못 되었으나 그 친구의 권유로 6개월 동안 유학에 필요한 토플 시험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는 나를 위해 미국에 있는 여러 신학대학원에 입학원서를 직접 써 주기도 했다. 20개 정도의 신학대학교 중 절반 정도 입학을 허락한다는 답을 받았다.
그 동안 토플 시험 준비를 한 뒤 서강대학교에서 두세 시간 동안 시험을 치른 결과 합격선에 들어 그 점수로 장학금을 신청했다. 그러나 장학금 사정 결과가 부정적이었다. 졸업 시험을 끝낸 그 친구는 유학길을 혼자 떠나고 말았다. 공항에서 그를 떠나 보내고 오는 길이 얼마나 쓸쓸하고 공허했는지 모른다.
나도 미국의 유수한 신학대학에서 신학 연구를 끝마치고 돌아와 모국 교회와 신학교에서 교수 활동을 할 수 있으리라는 부푼 꿈은 하나의 가슴앓이로 남게 되었다. 그 꿈을 대신할 또 다른 길을 선택해야 했다.
나는 무소유의 성직자의 길을 걷기로 굳게 결심했다. 신약에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첫째 그룹은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주님과 사도들의 철저한 무소유의 삶이고, 둘째 그룹은 자신들의 재산을 드려 복음 전하는 자들을 도우며 일하는 청지기의 모습이다.
무소유의 성직자의 길을 실천하려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르는 수제자와 같은 심정이 되지 않으면 불가능할 것이다. 비록 숫자는 적어도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성직자가 되어야만 주님의 양 무리를 인도할 수 있는 영적인 권능의 소유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회적 공동체는 혈통이나 이익을 중심으로 형성된 이익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형성된 영으로 연결된 공동체는 무소유의 의식을 따라 살 수 있는 영성 공동체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의 신학과 목회적 사고는 매시간 강론을 들으면서 서서히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강의 시간마다 들어오는 교수님들의 강론 속에서 주님의 음성과 성령님의 음성을 수없이 듣게 되었다.
나의 목회 원칙 몇 가지
대부분의 신학생들은 노회의 추천을 받아 교회 봉사를 통해 목회 훈련을 하도록 실천신학 교수에게서 지도 받게 되어 있다. 나도 신학 시절 여러 교회에 직접 나가게 되었다.
어떤 때는 주일 외에도 토요일 오후 시간까지 학생들을 지도하기 위해 달려가기도 했다. 나는 ‘목회자란 실천적인 목양의 현장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주일마다 목회 현장 속에서 만나는 다양한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데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우선 나의 목회 원리를 찾기 위해 몇 가지 원칙을 내세웠다.
첫째, 가능하면 한 교회 중심주의가 아니라 다양한 교회를 접해 보자는 것이다.
둘째, 나의 목회적 지도력에 대한 부단한 반성과 학우들과의 대화를 통해 얻는 평가 방법을 따르자는 것이다.
끝으로 내가 발전시켜 나아가야 할 목회적 자질을 어떠한 지도자의 모습으로, 다시 말해 어떤 이미지 창출로 연결시킬 것인가 분명히 하는 것이다.
사실 목회자는 자신의 이미지 관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시각 장애인이란 불리한 조건 때문에 어떻게 하면 장애인의 입장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하는 강박관념 같은 점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터라 나의 행동 하나하나 신경을 써야만 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