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말 무역할 때 이야기이다. 국민소득이 100불대 최후진국 수준인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었다. 수출 우선정책에 따라 수출 최일선에서 샘플 가방을 들고 불철주야 지구촌을 누비며 젊음을 보냈다. 그 당시 해외 바이어들이 오면 으레 술 접대를 해야 하는 문화였다. 나도 그 당시 술집에서 외국거래선들을 접대했었다. 그 당시 나는 교회집사이지만, 술 접대할 때마다 늘상 그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 크리스천 비즈니스맨으로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술 접대를 안하기로 결정을 했다. 그때 중요 거래선들이 때로 양주를 선물로 들고 오는 이들이 많았다. 그 당시에 시중에는 양주 판매상이 거의 없었고, 또 비싸고 구하기도 힘들었다. 그래 선물로 받은 양주들은 모아 놓았다가 연말 국내 거래선들한테 선물을 하곤 했다.
사업을 하면서 술 접대를 안하기로 결정하고, 바이어들에게 고지를 했다. 난 술을 먹지 않는다. 그러니 술병 사들고 오지말라. 그 대신 어떤 소품이나 초콜릿 같은 것을 가져오면 우리 아이들이 Happy 할 것이다. 그래 그 다음부터 거래선들이 그렇게 했다. 그런데 온 손님을 접대할 방법이 궁했다. 호텔에서 음식을 먹기도 하지만 호텔 음식은 온 세계가 다 똑같고 색다르지도 않다. 외국에 나가면 그 지방 토속 음식을 먹어보고 싶고, 그 지방 전통 풍물도 보고 싶다. 가정집을 방문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래 궁리 끝에 우리 집으로 초대키로 했다. 바이어를 집에 초청하고서 의자 있는 식탁을 사용하지 않고 땅바닥에 앉도록 했다. 바닥에 전통한국식탁을 펴 놓고 순수한 한국 토속 음식들로 접대를 했다. 빵이 아니라 한국식 쌀밥에 된장국 김치, 깍두기, 불고기, 고추장, 젓갈 등이다.
방바닥에 양반다리하고 앉게 하면 똑바로 앉을 줄을 모른다. 무릎을 꿇기도 하고 몸을 옆으로 틀고 비스듬히 앉기도 하며 이리저리 움직이며 어쩔 줄 모른다. 그래도 모른 체하고 내버려 두면 견디질 못한다. 몹시 고통스러워 한다. 양반다리로 앉음은 그들에겐 고문이고, 고통이다. 좀 더 고통을 겪도록 해 기억에 남도록 했다. 10여 분 지난 후 발을 뻗게 하고, 벽에 기대토록 해서 불편함을 조금 모면토록 했다. 그리고 아직 초등학교도 안 들어간 우리 집 자녀 3명도 같이 식사를 하며 친교를 했다. 독일어를 가르쳐주며, 아이들과도 소통하며 즐긴다. 그래 그때 배운 독일어를 중년이 된 자녀들이 지금도 가끔 암송을 한다. 그리고 내가 독일에 가면 그들도 나를 자신의 가정에 초대하고 온 가족들까지 다 모여 친교를 나눈다. 나아가 가족 왕래까지 오가게 되었다. 술이 없더라도 가족끼리 서로 왕래하다 보니 친밀하게 되었고 거래 관계도 믿을 수 있도록 하니 신뢰가 쌓였다. 그래 그 당시에 회전신용장(Revolving L/C)을 열어주어 우리 회사는 항상 L/C가 있으므로 무역 금융을 쓸 수 있었다. 그래 운영 자금이 항상 있으므로 국내 거래선한테 Master L/C가 Nego 안되어도 선적 후 4-5일 내에 자체자금으로 선 결제를 해 주니 국내 거래선으로부터 대환영이고, 항상 유리한 거래를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국내 금리가 18% 선인데다가, 그 당시 대기업들은 대개 6개월까지 어음을 발행할 때 현금으로 받으니 그만큼 우리 회사와 거래를 선호했다. 신뢰로 나는 사업을 키울 수 있었고, 신뢰가 자산이 되어서 비교적 사업이 순조로이 성장할 수 있었다. 신뢰가 자산이고 부의 원천이다. 요새 이 나라의 상황을 보면서 신뢰가 무너진 사회가 되어 가슴이 아프다. 신문방송을, 국회를, 헌재재판관을, 다수당을 신뢰할 수 있나? 오호, 통재라. 누구를 믿을 수 있나? 신뢰는 중요한 사회적 자산이고 기본이다. 사회적 신뢰와 국가를 무너뜨리는 승냥이들이 사라지면 좋겠다. 그래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대한민국 만만세.
두상달 장로
• 국내1호 부부 강사
• 사)가정문화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