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 나의 일생] 선교 140주년 선교유산  탐방 : 태화관 이야기 ②

Google+ LinkedIn Katalk +

당시 태화관의 주인은 이완용이었다. 태화관은 당시 2천 700평 대지 위에 기와집 16채가 서 있는 큰 집이었다. 이완용은 한일합방 이후(1911년) 이 집을 구입해 별장처럼 기거했으나, 동네 사람들이 밤마다 돌을 던졌다. 

이 무렵 지금의 백종원처럼 요리사로 요리업을 하던 안순환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조선 최초 요리집 명월관의 제2호로 태화관을 임대해 운영했다. 

3.1운동 이후 이완용은 목숨의 위태로움을 느끼고, 일본으로 도망을 갔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 앞에 자신의 집에서 독립선언문이 낭독되었다는 사실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이 집을 매물로 내어놓았다. 때마침 남감리회 여선교부 마이어(M.D. Myers) 선교사는 여성 선교를 위한 자리를 찾고 있었다. 1년여 흥정 끝에 마이어 선교사는 1920년 9월 20일 20만 원이라는 당시 큰돈으로 계약을 하고 그해 12월 11일 잔금을 치루고 구입한다. 

남감리회 여선교부는 그해 성탄절 역사적인 태화관에 입당해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자 했으나 안순환의 임대계약기간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어떤 보상으로도 이 집을 비워주려 하지 않았다. 마이어와 한국 직원들은 짐을 싸들고 태화관 방 하나를 차지하고 저녁시간이면 큰 소리로 찬송을 하고 예배를 드렸다. 오던 손님들이 슬금슬금 나가자 안순환은 기생들과 만취한 사람들은 예배처로 모여 장구, 북, 가야금을 동원해 더 큰 소리로 니나노를 외쳐댔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그 유명한 기(旗) 싸움이 시작된다. 밤에 감리교 청년들이 식당 간판 깃발을 내리면 낮엔 식당에서 다시 깃발을 올렸다. 목사님들의 아이디어로 이번엔 미국 국기 성조기를 마이어가 올리니 안순환은 그 국기를 내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집을 비워주었다. 그해 성탄절 이곳에서 남감리회 여선교부와 마이어 선교사는 성탄절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수리 과정을 거쳐 1921년 4월 1일 드디어 태화 여자관(태화 기독교 사회복지관)의 사역이 시작되었다. 이곳에서는 예배, 성경 공부, 부녀자 직업교육, 야학, 급식 등 여성 선교에 필요한 다양한 사역이 이루어지고 태화관의 성공적 사역을 바탕으로 전국 도처에서 남감리회 여선교관 사역이 이루어졌다. 요리집, 기생파티 술집이 변해 찬송, 말씀, 사회선교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가는 곳마다 땅이 변하고 집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공동체가 변화되었다. 그 변화의 역사 가운데에서도 태화관의 변화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마이어와 남감리회는 ‘큰 집’이라는 태화(太華)라는 발음을 그대로 두고 큰 평화, 큰 조화라는 뜻의 Great Shalom House, 태화(太和)관으로 부른다. 

태화관은 1939년 11월 연건평 718평 3층 석조건물로 지어졌다가 1978년 서울시 재개발 계획에 따라 12층 태화빌딩이 들어섰다. 그 곁에 삼일독립선언 유적지표가 세워지고 빌딩 안에는 독립선언 역사화가 걸려 있다. 참고로 명월관 1호 자리는 김성수 씨가 매입, 동아일보 사옥 빌딩을 세우게 된다. 그리하여 일제강점기 술집, 요리집이 선교, 언론의 터전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