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문학가 한스 카롯사는 “인생은 너와 나의 만남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만남의 존재입니다. 산다는 것은 만남으로 이루어집니다. 부모와의 만남, 스승과의 만남, 친구와의 만남, 좋은 책과의 만남, 서로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자연과의 만남 등입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만남을 통해서 결정됩니다. 씨앗은 땅을 잘 만나야 하고 땅은 씨앗을 잘 만나야 합니다. 백성과 신하는 왕을 잘 만나야 하고 왕은 신하와 백성을 잘 만나야 훌륭한 인물이 됩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하나님과 잘 만나야 합니다. 인생에서 만남은 모든 것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도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숟가락이 있습니다. 숟가락은 홀로 일하기를 즐겨합니다. 어렸을 때는 젓가락을 잘 사용하지 못하고, 숟가락으로 음식을 먹습니다. 그러나 커가면서 젓가락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에서 ‘둘’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자기’에서 ‘우리’로의 변화입니다. 너와 내가 함께하는 것을 배우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성장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젓가락은 두 개가 함께함으로 비로소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아무리 비싼 금으로 된 젓가락이라 할지라도 젓가락 한쪽 한 개만 있으면 반찬을 먹고자 할 때 쿡쿡 찔러서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젓가락 두 개는 서로가 합심해 포근히 음식을 감싸서 취하지만, 하나가 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젓가락 하나와 같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포용하지 못하고 쿡쿡 찌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 멍에는 두 마리의 소나 나귀가 짝을 이루어 메는 것으로, 홀로 메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함께 메는 것이 일반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멍에를 메라고 하신 것은 너 혼자서 멍에를 메라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곧 내가 너와 함께 메겠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목회는 주님께서 함께 지자고 내어주신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말씀이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그 말씀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다름이 아니라 사랑이었습니다. 결국 제가 체험한 주님의 멍에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기에 가볍고 쉬운 것이 되었습니다.
실로, 이러한 목양은 숟가락으로 될 수 없고 두 개가 함께 일하는 젓가락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두 젓가락이 서로 함께할 때 비로소 서로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두 젓가락이 누구의 손에 붙잡히느냐 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관점입니다. 바로 주님의 손에 붙잡히는 것입니다. 제2의 인생으로 출발할 수 있었던 사도 바울은 바로 이것 때문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이는 저의 목회 신조이며, 나를 나 되게 한 말씀입니다.
한편으로, 그동안 자기 숟가락을 들고 자기 의를 구하는 삶이 아니었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자기 숟가락을 채우려고 한 적이 없나 돌아보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 붙잡히고 난 이후의 삶은 다른 사람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곧 만남을 이루는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자기를 찾게 된 것입니다. 다시금 식탁에 앉아서 젓가락을 들고 생각합니다. 나는 서로 협력하는 젓가락이 되고 있는가!
한봉희 목사
<번동평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