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정치 권력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세상과 거리를 두고 오직 수도사처럼 신앙 생활만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인가? 어려운 과제이자 사람에 따라 견해가 첨예(尖銳)하게 달라질 수 있다. 국가 권력이 정의롭게 행사되지 못하고 남용(濫用)되면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희생자와 피해자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때 교회는 이들의 상처를 보듬어 주고 치료해 주는 것이 교회의 임무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나아가서는 정치권력 행사가 남용되지 않도록 막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히틀러 정권의 광란(狂亂)의 정치를 보고도 교회는 모르는 척 해야 했는가?
종교와 정치 권력이 밀착하면 교회는 부패한다. 교회가 정치 권력에 예속되는 것도 불행한 일이 된다. 교회는 시대에 대해 분명한 책임 의식을 가져야 한다. 20세기 저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K. Barth,1886~1968) 교수는 나치(Nazi) 정권이 교회를 간섭, 통제하는 것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칼 바르트는 히틀러에게 경례(敬禮)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일에서 추방되었다.
본회퍼(D Bonhoeffer,1906~1945) 목사는 히틀러가 광기(狂氣)를 부리고 있을 때 미국을 방문했다. 위험한 독일에 가지 말고 미국에 머물라는 권유와 함께 대학 교수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위기에 처한 조국 독일을 외면하고 혼자만 편안하고 안전한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향한 박해(迫害)가 기다리고 있는 독일로 돌아갔다. 본회퍼가 소속한 고백 교회는 나치 정권에 당당히 저항했다. 본회퍼는 유대인 학살과 학대에 침묵하는 교회에 실망했다. ‘수정(水晶)의 밤’(1938.11.9~10. 나치 독일의 폭력적 전환점)은 전 세계에 공포를 느끼게 했다. 유대인 회당(會堂)과 상점, 집들이 폭도들에 의해 불에 탔다. 잿더미가 되었다. 그날 밤에 2만 여 명의 유대인들이 체포되고 36명이 죽임을 당했다. 독일 교회는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본회퍼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악을 보고도 침묵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악이다”,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는 사상자의 장례를 돌보는 것보다는 핸들을 뺏어야 한다.” 교회가 권력의 도구가 되면 복음은 본질을 상실한다. 로마 제국에서는 교황청이 권력 기구가 되자 중세 교회가 부패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사명감으로 교회와 인류를 섬기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순종하는 모습이다. 우리의 삶은 주님 안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힘없고 희생된 이들을 섬기고 도와야 한다.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편에 서야 한다. 의(義)를 위해 용기가 있어야 한다. 용기란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맞서 행동하는 것이다. 권력의 부당(不當)한 행동을 목격하면서 침묵하는 것은 비굴한 행동이다.
어떻게 해야 할 지 판단이 서지 않으면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해야 한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자 겸손히 물어야 한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며 가르침에 따라 행한다. 시대의 불의와 불법을 향해 지도, 훈계를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시대의 양심에 대한 책임 의식을 외면하고 세상에 복종하는 것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 깨달아지면 그 뜻에 복종해야 한다. 성령께서 일깨워 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진리를 볼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최선을 다 할 때 자유할 수 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을 바라보는 성도의 마음가짐, 주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야 한다.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 매일 새로운 지식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교회의 사역(使役)의 방식을 보여주며 말씀하고 계심을 항상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교회가 되기를 기도하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