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의 열망과 신앙의 힘, 익산•목포서 피어난 3.1운동
문용기는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재학하고 있는 김병수와 함께 익산 지방 3‧1운동을 준비했는데 드디어 익산에서도 1만여 명이 모이는 대대적인 3‧1운동이 전개됐다. 박은식 저서인 <조선독립운동의 혈사>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문용기는 기독교 신자로서 전라도 군산항 영명학교 교사였다. 마침 4월 중순 이리역에는 1만여 남녀 군중이 모여 독립시위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이에 놀란 일제의 수비병들은 급히 출동해 이들을 해산시키려고 검을 휘두르며 발포했다. 그러나 용기는 태연자약하며 연설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왜병은 국기를 잡고 있는 용기의 오른팔을 칼로 내리쳤다. 그러나 용기는 굴하지 않고 다시 왼손으로 국기를 붙들고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그러자 왜병은 용기의 왼쪽팔을 내리쳤다. 두 팔을 내리찍힌 용기는 그대로 용기를 내어 몸으로 국기를 받치고 서서 군중들에게 만세를 부르라고 재촉했다.”
이때 문용기의 양쪽 어깨에는 칼을 맞아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다. 김병수도 일제의 헌병대에 체포됐으며 문용기도 현장에서 체포됐는데 이들은 모두 재판을 거쳐서 형을 받고 각각 옥살이를 했다.
와킨스중학교를 졸업한 문용기의 졸업장이 현재 천안에 있는 3‧1운동 독립기념관에 전시돼 있는데, 그때 입었던 핏자국이 담긴 옷 역시 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이 와킨스중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교사와 학생들은 1919년 목포 지방 3‧1운동을 준비했다. 이 운동은 목포 영흥학교에서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정명여학교 교사 및 학생들도 합세했으며, 여기에 목포교회 교인들까지 합세했다. 이들은 남교동시장을 지나 목포재판소 앞을 지나서 목포경찰서 앞까지 당당하게 ‘대한독립만세’를 수없이 부르면서 전진했다.
이렇게 배유지 선교사가 기초를 믿음 위에서 튼튼하게 세웠기에 그 무서운 일제에 대항해 당당하게 외칠 수 있었으며, 역사의식을 바로 세웠던 당시 목포 두 남녀 미션학교 학생들의 힘이 컸다.
이 학교 출신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서남동 교수가 있다. 서남동은 신안군 자은 출신으로서 일찍이 목포 영흥학교를 졸업하고 전주 신흥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원래 학문을 좋아했기 때문에 신흥고등보통학교 4년을 마치고 도일해 교토에 있는 동지사대학 신학부 예과에 입학해 당당하게 일본인 신학도와 어깨를 겨루면서 학업에 열중했다.
이때 기초학문을 튼튼하게 다졌던 서남동은 그후 대구 지방에서 잠시 목회를 하다가 상경해 한신대와 연세대 신과대학에서 현대신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했다.
특별히 박정희 군사정권에 항거하면서 민중신학을 발표함으로써 그는 세계적인 신학자로 명성이 알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와 뿌리가 있었던 목포 영흥학교는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로 더 이상 학교를 운영할 수 없어 폐교를 단행하고 선교사들은 귀국했다.
그동안 목포 여흥학교를 헌신적으로 발전시켰던 변요한 선교사와 유서백 선교사, 김아각 선교사는 목포 사람들이 잊을 수 없는 선교사들이었다. 변요한 선교사는 광주에 선교부가 활발하게 전개되자 광주로 옮겨 갔으며, 그곳에서 얼마 동안 사역하다가 순천선교부 창설자 겸 그곳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역시 선교사들의 추방으로 귀국했다.
유서백 선교사는 목포선교부의 파송을 받고 목포 영흥학교와 도서 지방 당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인재를 키우는 일에 큰 몫을 담당했다. 유서백 선교사는 미국 이름이 니스벳(Rev. John Samuel Nisbet)으로서 1906년 교육담당 선교사로 파송받고 한국으로 왔다. 때마침 전주 신흥학교의 육성을 위해서는 교육전문가 선교사가 필요했기에 유서백 선교사가 초청돼 교장으로 취임했다.
교장으로 취임한 유서백 선교사는 부부가 함께 전주와 전주 신흥학교 교장 재임 기간 중 전주에서 근대화교육에 가장 앞장섰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목포선교부에서는 그들 부부를 초청해 유서백 선교사는 목포 영흥학교 교장으로, 그의 부인은 목포 정명여학교 교장으로 각각 임명했다. 그렇다고 이들 부부는 학교에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이미 맹현리 선교사가 닦아 놓았던 신안 앞바다를 비롯해 진도, 오나도 지방에 흩어져 있는 섬교회 당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유서백 선교사 부인이 정명여학교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1919년 3‧1운동이 거세게 일고 있었다. 그 바람이 목포에까지 불어 목포 정명여학교 학생들도 애국심에 불타 3‧1운동 준비에 열중했다.
교장인 유서백 선교사 부인은 혹시라도 학생들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고생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하나 긴장 속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학생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이웃에 있는 영흥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이에 놀란 유서백 선교사 부인은 2층 교장실에서 급히 뛰어 내려오다가 그만 발을 잘못 딛어 쓰러지고 말았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오랫동안 프렌치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1920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후 유서백 선교사는 부인을 잃고 걱정에 싸여 있을 때, 목포 선교부에서는 그를 일시 귀국시키고 그 대신 커밍(D. J. Comming, 한국명:김아각, 이하 김아각으로 표기) 선교사로 하여금 영흥학교 교장의 책임을 맡게 했으며, 정명여학교는 조마구례 선교사가 교장직을 수행했다.
광주선교부와 배유지 선교사
광주선교부 개설
배유지 선교사는 전남 내륙 지방 선교에 대한 관심이 남달리 강했다. 이미 전남 지방의 중심지였던 나주에 있는 선교부를 설치하지 못한 아쉬움이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때마침 전라남도 도청소재지가 광주에 개설된다는 소문을 듣고 배유지 선교사는 자신의 좋은 협력자였던 목포교회 김윤수 집사를 1904년 4월에 파송해 터전을 마련하기로 했다.
그런가 하면 이미 배유지 선교사와 오원 선교사가 목포에 있으면서 돌보던 광주 지방 근처에 있는 교회들이 핍박을 받고 있었다. 장성에 있는 영신교회와 하나말교회가 그곳이다. 변요한 선교사가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낸 서신에 이런 내용이 담겨져 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