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청교도의 큰 봉우리, 존 오웬

Google+ LinkedIn Katalk +

존 오웬(J. Owen, 1616~1683)은 영국이 낳은 위대한 신학자, 목사, 청교도 사상의 정수(精髓)를 보여준 지도자이다. 천부적인 지적 능력과 통찰력, 탁월한 영성의 소유자였다. 아버지 헨리 오웬도 청교도 목사였다. 오웬은 ‘성령과의 교제’를 신앙 생활의 핵심이라고 했다. 성령과의 교제는 청교도 신학과 신앙의 중심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과 구주로 받아 들이고 그의 말씀에 복종하며 살기를 소원했다. 예수님과 함께 거하며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고 그의 지배를 받고 살기를 원했다. 신학적으로는 성경의 권위와 칼빈주의 신학을 받아 들였다. 

1643년 그는 포드햄 교회의 교구목사가 되어 집집마다 심방하면서 교리 문답을 가르쳤다. 얼마 후에 에섹스 지역의 유명한 교회의 교구 목사로 청빙을 받았다. 부임 이후 2천여 명의 회중이 모여들 만큼 성장했다.  

오웬의 인품은 단아(端雅)하고 우아(優雅)했다. 강단에서는 은혜로운 행실을 보였다. 웅변적인 설득력, 단정한 품행으로 회중을 감동시킬 수 있었다. 크롬웰은 1652년 옥스포드 대학의 부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653년에 청교도 혁명의 최전방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 

오웬의 말이다. “불평은 어떤 불행도 치료할 처방이 되지 못한다. 탄식하는 것도 명예로운 직임(職任)을 맡은 이들에게는 합당하지 않다. 무거운 짐을 담대하게 감내하는 것은 불굴의 마음이다.”

당시 옥스포드 대학은 학문적으로 낮은 수준이었고 부도덕과 무절제가 대학 분위기를 지배했다. 부총장으로 재직하면서 학문적 분위기를 회복하고 영적인 분위기를 점차 확산시켜 나아갔다. 

크롬웰이 왕권에 도전하려 하자 이에 비판적인 오웬은 크롬웰과 결별하게 되었다. 1660년 이후에는 크롬웰의 사망으로 인해 청교도가 핍박을 당하기 시작했다. 결국 강단에서 추방되는 고초를 겪었다. 1622년 통일령(The Act of Uniformity, 엘리자베스 1세 때, 1558~1603 재위, 영국 국교회의 예배의식과 기도를 통일 시킨 법령)에 의해 청교도 목사 2천여 명이 강단에서 쫓겨나게 된 것이다.

1683년 6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스펄전이 한 무명의 평신도 설교를 통해 회심을 했던 것처럼 오웬도 무명의 설교자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라는 내적 확신을 갖게 되었다. 마음에는 놀라운 평안이 깃들고 영적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성화(聖化)는 은혜의 원리에 따라 주어진 성령의 역사이다. 

오웬은 회심한 이후 일생 동안 겸손하게 살았다. 존 오웬이 런던에 올 때마다 존 번연의 설교를 들었다. 국왕 찰스 2세가 오웬에게 “당신처럼 학식이 높은 자가 땜장이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오.” 오웬은 대답했다. “국왕 폐하, 제가 만일 그 땜장이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저는 아주 기쁘게 제 모든 학식을 버리겠습니다.” 

오웬은 평생 동안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며 살았다. 자신의 죄에 대해 엄격했다. 자신의 재능과 명예를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의존했다. 죄 문제를 파헤칠 때는 늘 십자가를 묵상했다. 십자가의 능력만이 죄를 물리칠 수 있는 근원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은혜는 영적인 것들을 생각하고 묵상함으로써 얻어진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마음의 생각을 거룩하고 신령한 하늘에 두어야 한다. 오웬은 죄를 물리치기 위해 마음을 하나님께 두고 죄와 타협하지 않으며 겸손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았다. 교회 지도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존 오웬이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