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3.1운동 106주년, 기독교인 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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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에게 존경받은 지도자이자 교육가

들어가는 말

3.1운동 106주년을 맞아 누구보다 우리나라를 아끼고 하나님을 사랑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생애에 주목했다. 선생은 개항기 때 의정부 총무국장 등을 역임하다가 국권 피탈 이후 YMCA 전국연합회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민족운동을 이끈 관료이자 기독교인 독립운동가였다. 무엇보다 3.1운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고 오직 조국의 독립과 민권,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았던 믿음의 선조였다.

❙  생애

  • 고종의 신임 얻은 강직한 성품

목은 이색(1328~1396)의 16대 후손으로 1850년 오늘날의 충남 서천에 해당하는 한산에서 태어난 월남 이상재 선생은 어려서부터 서당에서 유학의 기초를 공부하고 13세 때 춘추좌씨전을 탐독하는 등 전통적인 유교 지식인의 길을 걷는다. 그는 18세에 과거를 응시했지만 당시 만연한 부정부패의 현실을 목격, 과거를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를 통해 죽천 박정양(1842~1905)의 개인 비서가 되어 개화사상을 접하고 박정양, 김옥균 등과 함께 신사유람단의 일원이 되어 일본을 건너가 신흥문물과 사회 발전상을 보면서 조선 사회 역시 개항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갑신정변 이후 박정양이 주미 공사로 임명되자 이상재는 1년간 서기관으로 동행했고 이는 미국 근대사회를 체험하고 조선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의정부 총무국장을 역임하며 고종의 신임을 얻은 그는, 개인의 이권을 청탁하는 상소문을 전부 폐기하는 등 부정과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성품으로 일관하며 늘 준엄하고 당당하게 집무에 임했다.

  • 3.1운동의 반석이 되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민중의 참정권을 주장하면서 만민공동회 등을 주도하다 1898년 강제 해산 이후 낙향했다. 그러다 1902년 ‘유길준 쿠데타 사건’에 휘말려 둘째 아들 이승인과 함께 투옥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상재는 전혀 관여한 바가 없지만 쿠데타 세력 포섭 대상에 이름이 올라 있었기에 체포된 것이다. 이때 감옥에서 이승만으로 대표되는 청년 지식인들을 만나서 기독교 성서들을 읽고 기독교에 입교하게 된다.
을사조약으로 국권이 박탈된 소식을 접하고 그는 기독교도들과 애국계몽운동을 지원하고 황성기독교청년회 활동 등을 통해 국권회복에 기독교계가 적극적으로 나서도록 역할을 다했다. 전국 각 지방을 순회하며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면서 천도교·불교와 손을 잡고 독립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국외 민족운동 진영에서는 국내 민족운동 진영 대표로 월남 이상재 선생을 꼽을 만큼 영향력이 큰 민족 지도자였다.
3.1운동은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선포에 영향을 받아 태동했고, 민족 대표 33인을 필두로 조선의 독립 선언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것을 목적으로 했는데, 이러한 핵심적인 운동에 월남 이상재 선생을 생각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나 3.1운동 선언에 참여해 달라는 요청을 이상재 선생은 거절했다. 독립의 의지가 갑자기 꺾였던 것일까. 요즘 말로 ‘큰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이상재 선생은 후에 경무총감부 심문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조선의 독립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다. 그 운동에는 찬성하나… 제1회 운동에는 이름을 내지 않고 뒤에 남아서 독립운동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말을 통해, 일시에 많은 민족 지도자를 잃을 것에 대한 우려를 포함해 3.1운동의 뒷수습을 하고 지속적인 민족운동을 이끌겠다는 원대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이상재 선생은 3.1운동을 비폭력 저항 운동 방법으로 진행하기를 원했고, 그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3.1운동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인도주의와 평화주의를 내세운 만세운동의 방식으로 실시되었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 그의 영향력을 겁낸 일제는 예비검속을 통해 이상재를 투옥시켰고, 70세의 연로한 그를 고문하며 협박했지만 결국 3.1운동에 직접적인 관여 사실을 찾아내지 못하고 증거불충분으로 재판을 종결했다. 이때 보석금을 내주고 석방을 위해 노력한 인물이 YMCA의 윤치호였다.

  • 기독교인 민족지도자로서 이후의 행보

이상재 선생은 1919년 4월 한성임시정부 출범의 배후에서 활동하며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민권이 회복되어야 한다는 정치사상을 갖게 되었다. YMCA를 중심으로 하는 기독교계 세력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한성임시정부(이후에 상해임시정부와 통합)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이상재 선생은 기독교 민족주의를 신봉하고 민족운동을 이끌어 나갈 적임자로 이승만을 추대하기도 했다. 또한 ‘근대 문명의 물질적인 힘이 곧 정의’라는 제국주의적 강권 지배를 비판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우리는 하나다. 우리의 천국은 세상의 어떤 경계도 초월한다. 그러므로 민족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천국을 건설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자. 비록 천국이… 그 본래 목적은 남을 지배하거나 파괴하는 것이 아닐지니, 오히려 서로 도와 모든 민족의 구원을 완성해야 할 것이니라’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직접 모은 독립 자금을 이승만에게 보내 외교독립운동을 후원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을 다양한 문건으로 지원하며 한민족의 독립과 민족운동 진영의 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기독교 문화의 창출을 목적으로 하는 기독교문서운동에도 앞장서며 고령과 병환으로 좋지 않은 몸 상태에서도 대한민국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1924년 9월 우창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고 조선민중의 신문사로 만들기 위한 첫 번째 방법으로 월남 이상재에게 사장직을 부탁했다. 이상재는 분열과 혼란에 싸인 한국 사회를 위한 언론의 역할을 강조하며 사장직을 맡아 기자 및 임원들의 통합을 종용하고 혁신을 진행하며 신문의 중심을 잡는 데 노력했다. 민족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 일제와 투쟁할 목표로 조직된 신간회 창립회장으로 추대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사상

  • ‘포스트 컨퓨시니즘(유교)’

유교 지식인으로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동안의 가치관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수 있는 ‘문화 대충격’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유학을 익히고 과거에 응시까지 했던 이상재 선생도 다르지 않았다. 주미 공사관 시절, 이상재 선생은 청국 관리로부터 미국 문명은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미국 문명이 부강한 비결을 배우기 위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미국이 단순히 물리적 힘만을 숭상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과 미국 문명의 정신적 가치를 인정하고, 조선의 유교적 가치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기독교에서 비롯된 가치나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성감옥 수감 시절 이승만, 신흥우 등이 감옥학교를 개설, 정동성서공회가 수백 권의 책을 후원해 감옥 도서실을 만든 데에 위로와 희망을 얻은 그는, 구국을 위한 방책을 위해 연구하던 기독교로 아예 개종을 하고 감옥 내 성경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 그리스도인 이상재

지옥과 같은 감옥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천국을 소망하게 된 이상재 선생은 석방 후 게일 선교사가 시무하는 연동교회에 출석했다. 동시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독교를 기초이자 통로로 두며 청년운동을 통한 아래로부터의 변화, 교육정책을 통한 나라와 민족의 개혁을 열망했다. 기독교 신앙에 기초해 서양의 정치와 제도를 받아들이고 좁은 민족주의 시각에서 벗어나 세계주의적 관점을 수용하는 한편, 당시 비교적 고루해 보일 수 있었던 동양적 가치의 중요성 또한 역설하며 문화적 정체성의 자긍심을 형성했다.
부정과 불의에 대해 가차 없는 성격을 지닌 그는 바른 모습을 보이지 못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사상이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적대하고 대화조차 하지 않으려는 일부 기독교 선교사와 교인들의 오만함과 독선에 대해 쓴소리를 냈고, 기독교 정신인 관용과 사랑을 전파할 것을 권면했다.
이상재 선생은 창조의 하나님과 역사의 하나님을 분명히 인식하고,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할 것을 강조했다. 사랑과 용서, 자기희생 등 기독교 도덕이 중심이 되어야 세계에 진정한 평화가 올 수 있음을 역설하며 유가의 어짊과 용서라는 가치관과도 맞물린 교훈들이 있음을 설파했다. 선생은 기존의 가치와 충돌할 수 있었던 기독교를 받아들였음에도 전통적인 유교적 윤리를 배제하지 않고 이를 보완해서 전통문명과 근대문명을 포괄하며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쳤고, 민중은 사회윤리적으로 존경받는 민족지도자였던 그의 영향을 깊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나오는 말

어릴 적부터 유학을 공부했고 조선 말기에 관직을 지내며 자칫 전통적 유교 사상에만 머물러 있을 수 있었지만, 이상재 선생은 개화파 지식인들과의 교류 및 신사유람단과 미국 체류 기간 등을 통해 사고의 문을 열고 진정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길이 무엇인지 깊이 고심했다. 그의 염원은 내각 신료 및 민중들에게도 전해지며 구국의 지도자, 민족의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는 이미 왔으나 아직 오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며 새로운 세계를 위해 특히 청년들에게 그 사명과 책임을 기대했다. 역사를 주재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실현시키실 것을 믿으며, 청년세대가 앞으로 살게 될 새로운 사회의 주역임을 인식하고 진취적이고 헌신적인 다음세대의 지도자가 될 것을 권면하고 격려했다. 낙담과 절망의 시대에서 그는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한 줄기 빛으로 산화하며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와 다음세대들을 위해 낙관적 희망을 제시해 주었다. 3.1운동 106주년, 전면에 나섰던 많은 기독교 독립운동가들도 있으나, 그들을 물질적·정신적·정치적·사상적으로 지원하고 이끌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서울 종묘공원에 그의 동상이 남아 있다.
/신희성 기자
*사진 및 참고자료 : 서울YMCA, 김권정, 『월남 이상재 평전』.

 

 

 

 

 

종묘공원에 자리한 월남 이상재 선생 동상과 설명비.

▣ 이상재 연보

1850년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부친 이희택과 모친 밀양 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867년 과거시험에 낙방, 친지의 권유로 박정양의 문객이 됨
1881년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일본의 상황을 조사·시찰
1884년 우정총국 개설, 홍영식의 추천으로 인천 우정분국장에 임용, 갑신정변 이후 관직을 자진 사퇴하고 낙향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할 때 서기관으로 임명, 약 1년 동안 미국에서 활동
1892년~1905년 전환국 위원, 학부아문 참의, 학부 참서관 및 법무 참서관, 관립외국어학교장, 내각 총서 및 중추원 1등 의관, 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
1896년 서재필․윤치호 등과 독립협회 조직
1898년 만민공동회를 개최, ‘헌의6조’를 기안하여 정부에 제출, 이 사건으로 체포 후 석방, 사직 상소 제출
1902년 반역 음모 혐의로 아들 승인과 함께 구속, 한성감옥에서 2년간 옥고, 기독교 입교
1904년 석방, 연동교회 출석,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
1908년 YMCA 종교부 및 교육부 총무 취임
1919년 3․1운동으로 구속, 조사
1920년 조선교육협회 창설에 참여, 회장 취임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
1924년 조선일보 사장 취임
1925년 제1차 조선기자대회 개최
1925년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 초대 회장 역임
1927년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
1927년 78세의 일기로 재동 자택에서 별세, 우리나라 최초 사회장으로 장례 거행
1957년 묘소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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