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 참배 강요 속에서도 끝까지 신앙 지킴
일제 탄압과 심한 고문… 감금 중 해방 맞아
“우리는 그가 계속 겸손하게 말하고 우리 주님께서 힘을 주셔서 신자들의 신앙을 견고히 하며 불신자들을 회개하게 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일제는 기독교를 저들의 식민통치에 커다란 장애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교회를 항일애국사상의 발상지로 보고 교인들을 백안시했다. 그들은 음으로 양으로 기독교를 탄압했으며, 노골적인 배교 수단으로써 신사참배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신사참배는 두말할 것 없이 우상숭배요, 우상숭배는 설사 그것이 외부의 강압으로 마지못해 저지른 일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모독임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당시의 많은 교역자와 신도들은 이 신사참배 문제로 큰 시험에 빠졌다. 저들의 박해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버틴 사람도 없지는 않았으나 본의 아닌 억울한 희생자가 많이 생기게 되었다.
하루는 종로경찰서에서 형사 한 사람이 김익두 목사를 찾아왔다. 김익두 목사는 ‘올 것이 왔구나’ 생각했다. “나를 연행하러 왔소?” “아니, 그게 아니라 상부의 지시가 있어서요.” “지시라니요?” 그러자 형사는 신사참배 문제를 끄집어냈다. 신사에 참배하는 것을 국민된 도리니, 교계의 지도자가 이것을 외면해서는 안 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우리 교인은 하나님을 마음의 아버지로 알고 있으므로 딴 신을 섬기지 못합니다. 당신 같으면 두 아버지를 섬길 수 있겠소?” 김익두 목사는 반문했다.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국민된 의례로써 고개를 한 번 숙일 뿐인데, 그렇다고 딴 신을 섬긴다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말이었다. 김익두 목사가 끝내 거절하자 형사는 “상부의 지시가 있으니 선생께서는 생각하셔서 후회가 없도록 하세요”라고 뒷맛이 쓴 말 한마디를 던지고 가 버렸다.
그 후 형사들이 번갈아 매일같이 찾아와서 신사참배를 종용했으나 김익두 목사는 요지부동이었다. 하루는 형사가 와서 김익두 목사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정 그러시다면 당국으로서도 잠자코 있을 수는 없겠군요” 하며 가버렸다. 며칠 후에 형사가 다시 찾아와서 “서장님이 선생을 좀 보자고 합니다”라고 했다. 김익두 목사는 하는 수 없이 형사를 따라나섰다. 서장은 김익두 목사를 안내한 형사를 밖으로 내보내고는 신사참배 문제를 꺼냈다.
“보고는 들었습니다. 남의 이목 때문에 참배를 거절하신다면, 내가 모실 테니까 잠깐 같이 신사에 올라갔다 옵시다.” 서장으로서 김익두 목사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선심이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김익두 목사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간단한 일인데 그럴 것 없지 않습니까? 협조하시면 앞으로 목사님의 부흥운동에 힘이 되어 드리지요.” “나는 절대로 두 신을 섬길 수 없어요.”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군. 좋아!” 서장은 이렇게 쏘아붙였다.
김익두 목사가 끌려 들어간 곳은 군데군데 핏자국이 남아 있는 때가 절은 다다미방이었다. 형사가 김익두를 방 안 바닥에 꿇어 앉히고 나가더니 곧 두 형사가 들어섰다. “영감, 고집 좀 작작 부리지 그래.” 첫 마디부터 거칠었다. 김익두 목사는 많은 매를 맞고 풀려났다.
1940년 신의주 제일교회에서 부흥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김익두 목사는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교인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했다. 일제는 이를 기독교인의 황국신민화를 위한 선전자료로 삼았다. 그러나 1942년에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종로경찰서에서 15일간 극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일제가 함구령을 내려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에 감금당하기도 했다. 김익두 목사는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