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격이나 품성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형성되는 상호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교감이나 감정 이입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는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기를 원했고, 상대방의 이름이나 활동들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데 관심을 크게 기울였다.
신학교의 분위기는 항상 화기애애했다. 매일 드리는 학내 예배는 영감이 넘치는 찬양을 함께 부르는 데서 크게 고조되었다. 내게는 답답한 심정을 풀어 주는 청량제와 같은 시간이었다. 때로는 확대 부흥회를 통해 목회자적 소명의식을 강조할 때면 헌신 봉사하려는 뜨거운 체험을 할 수 있었다.
학우들 중에는 소그룹 신앙 운동을 형성해 미래 지향적인 연구나 활동, 봉사 등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 같은 소그룹 운동까지 참여할 만한 에너지는 없었다. 내가 해야 할 학과 공부와 밀린 과제물을 하기에도 하루하루가 너무나 벅찼기 때문이다.
학내 부흥회는 봄철과 가을철 두 차례 있었다. 내가 여섯 차례 참석한 학내 부흥회를 통해 받은 감동은 매우 컸다. 부흥 강사 중에는 아주 철저하게 장로교회 신앙의 전통을 강조하는 보수적 신앙 태도를 역설하는 분을 비롯해 폭넓은 현대 목회적 목양을 강조하거나 경건과 학문을 동시에 강조하는 분도 있었다.
그 중에서 나는 급진적이고 진취적인 목회보다는 비교적 보수적이거나 중도적 입장에 서 있는 온건한 주장에 공감을 느꼈다. 하지만 나의 목회 방향은 특수 환경을 고려해야 하므로 내 스스로 어떤 활성화 모델을 염두에 두고 깊이 기도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시각장애인 선교 위해 죽을 각오가 되었는가?
나는 앞으로 나를 포함한 20만 명에 이르는 시각장애인에게 소망의 빛과 희망의 닻을 내릴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해야 했기에 어떻게 하든지 시각장애인 선교란 큰 프로젝트를 그려 나가는 기획을 여러 각도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시각장애인 선교의 현황 조사부터 시작해 시각장애인이나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의 현황까지도 염두에 두면서 조사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참으로 열악한 형편에 있는 시각장애인 선교의 씨앗을 만들기 위해 나 스스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져 다시 부활하려는 의식을 지닐 필요가 있었다.
‘과연 나는 시각장애인 선교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과연 한 알의 밀알이 되어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을 수 있는 힘찬 생명의 저력을 내 몸과 마음과 뜻과 정성이란 인격체 속에 불어넣고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해 스스로 자문자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려면 나는 우선 청빈과 겸손을 통해 무소유한 자의 영성을 철저하게 점검해야 했다.
말로만 아니라 구체적으로 선교활동을 어떻게 밀고 나아가며, 오늘의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설득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내놓을 수 있는가 깊이 통찰해야만 했다. 나는 자문자답하다가 낙심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럴 때마다 조용히 예배실을 찾아가 묵상하며 주님의 뜻을 기다리곤 했다.
나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나의 선교활동만은 무소유한 입장에서 실천해야 하는 철저한 봉사활동 영역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면 나는 먼저 한 알의 순수한 알곡이 되어서 심겨질 수 있는 자기 내 평화와 자기 영성화가 우선적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만일에 내가 흠과 점과 티가 없는 진주처럼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신부다운 모습으로 단장되지 않고서 어떻게 이러한 선교에 임할 수 있겠는가.
나의 신학생 시절은 분명한 목회 원리와 선교의 대상과 방향을 구축하기 위한 또 하나의 영성 훈련 기간이었다. 나는 역사와 전통이 있고 수많은 교회가 있는 어머니 교단 소속인 장로회신학교에서 수학했기에 얻을 수 있었던 많은 유익한 점들을 두고두고 감사한다.
사실 나는 목회에는 문외한이었고, 신학에는 입문도 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장차 주님께서 시각장애인 선교의 역군으로 쓰시기 위해 나를 이와 같이 좋은 환경 속에서, 아니 신앙과 학문과 선교적 열정이 하나가 된 옥토 속에서 다양한 비전을 갖게 하시고 열매 맺게 하신 은혜를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목회 동역자들을 만나 한평생 동안 선교와 목양의 협력자로 일할 수 있었던 점을 깊이 감사드린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