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선교의 시작과 배유지 선교사의 헌신
“지난 주일 밤에 무례한 무리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 하나말교회를 습격했습니다. 교인들은 수없이 구타를 당하고 성경책은 갈기갈기 찢기어졌으며, 이때 교인들은 할 수 없이 산으로 피신을 하였습니다.” (1904년 4월 2일, 변요한 선교사 서신)
이러한 핍박은 장성군 영신교회에서도 일어났다. 배유지 선교사는 광주에 선교부가 창설되면 자연히 관찰사들이 교회를 탄압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래서 배유지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가 모이는 연례 모임에서 광주에 선교부를 신설해줄 것을 청원했다.
“광주는 전라남도 인구의 중심지이다. 비록 목포에서 얻을 수 있는 문명의 편안함은 없다 할지라도 선교를 위해서는 적합한 장소이다.” (1904년 12월 14일 변요한 서신 중에서)
또한 이때 광주 지방에는 송정리교회, 나주 삼도리교회, 곡성 옥과교회 등 많은 교회들이 속속 설립되어 있었기에 이들 교회를 목포선교부에서 돕는다는 것은 거리도 서로 너무 멀었고, 앞으로 나주, 화순, 보성, 담양, 구례, 곡성 등 여러 지방에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 중요했기에 광주선교부 설립을 준비했다.
한편 배유지 선교사는 선교사 연례회의 결의에 따라 김윤수 집사에게 건축에 대한 업무를 맡기고 자신은 결혼 준비를 위해서 1904년 4월에 귀국했다. 배유지 선교사는 여러 친지들과 교우들의 환영 속에서 결혼예식을 올리고 부인과 함께 목포로 돌아왔다. 다행히 그의 부인은 한국에 대해서 잘 이해하는 여성이었다. 그의 부인은 군산선교부에서 학교 선교와 농촌 선교에 탁월한 역량을 갖고 있는 부위렴 선교사의 여동생이었다. 그래서 배유지 선교사는 좋은 반려자를 맞이해 좋아했으며, 배유지 선교사가 곧 목포를 떠나게 되자 목포교회 교인들은 많이 아쉬워했다.
배유지 선교사는 신혼여행도 반납하고 1904년 12월 19일 오원 선교사 가족과 함께 목포를 떠나 영산강을 타고 나주를 거쳐 광주에 왔다. 배유지 선교사는 광주 읍내에서 조금 벗어난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 동산에 주택을 마련하고 그 주택에서 1904년 12월 25일 성탄절을 맞이해 첫 예배를 드림으로 광주선교부와 광주교회가 출발했다. 물론 오원 선교사도 의사였기에 그의 가정집도 진료소의 역할을 했으며, 그 외의 시간은 전남 지방의 동남부 지역을, 배유지 선교사는 전남 지방의 서북부 지역을 맡아 선교했다.
이러한 관계로 배유지 선교사는 장성, 나주, 영광, 담양, 곡성, 구례 지역을 맡게 됐고, 오원 선교사는 화순, 보성, 고흥, 순천, 광양, 여천 지역을 맡아 선교에 임했다. 그런데 배유지 선교사 주택에서 첫 예배를 드린 광주교회는 예배 장소가 좁아서 할 수 없이 북문 안으로 이사해야 할 형편이 됐다.
그런가 하면 배유지 선교사 주택은 장소가 넓어서 청소년교육의 좋은 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1907년에는 그 장소에서 남녀 어린아이들을 모아 놓고 교육을 실시했다. 점점 아이들이 많아지자, 남학생들은 배유지 선교사 사랑채에서 교육을 하고 여학생들은 변요한 선교사 사랑채에서 교육을 했다.
광주교회는 뜻하지 않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면서 유년주일학교 학생들도 많아졌다. 이미 목포 영흥학교를 설립한 경험이 있었던 배유지 선교사는 1908년 2월 1일 정부로부터 정식인가를 받고 하나님을 유일하게 섬긴다는 의미로 숭일(崇一)학교라 이름했다.
광주 숭일학교에 계속 학생들이 몰려 시설의 부족을 느낀 배유지 교장은 미국 교회에 직접 선교사를 통해 서신을 보내 미션학교로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좋은 시설을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1909년 여름에 광주에 있는 선교사들과 광주교회 교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예배를 드리고, 건축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1910년에 현대식 4층 건물을 준공했다. 그리고 1911년에는 14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했으며, 이들은 다시 고등과에 진학해 4년의 과정을 마치고 호남 지방의 새로운 지도자로 탄생됐다. 이중 최영욱이라는 학생은 선교사들의 배려로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했다.
최영욱은 광주 초대 교회의 교인 중 한 사람이었던 최흥종의 동생이었다. 최흥종은 배유지 선교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장로가 되고 목사가 됐는데, 그는 일생을 나환자의 좋은 친구로서 목회자로서 살았다.
최흥종과 배유지 선교사
최흥종은 광주 태생으로 한학에 능했으며, 성격이 괄괄해 성격대로 순검에 지원했다. 그는 순검으로 활동하다가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그 날로 순검을 그만두고 방탕한 생활로 전락했다. 그래서 그는 매일같이 주먹이 센 청년들 30여 명을 모아 폭력단을 조직하면서 광주 시장은 물론 인근 지방의 장터까지 장악했다. 시골에서 올라오는 장꾼들을 괴롭히고 장꾼들의 돈까지 갈취했다. 이에 시골 장꾼들은 동네 앞에 있는 성황당에 가서 두 손을 모아 절을 했다.
“산신령님, 오늘은 제발 최흥종이란 사람을 만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머리를 숙여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여전히 장날에는 최흥종이 이끄는 폭력단이 장터 골목마다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1909년 4월 1일 목포 프렌치병원 원장이었던 보의사 선교사가 급히 목포에서 배를 타고 영산포를 거쳐 말을 타고 나주를 지나 광주에 거주하고 있는 오원 선교사에게 가야 하는 일이 생겼다.
“마부 아저씨, 지금 광주에 있는 오원 선교사가 급성 폐렴으로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빨리 말을 몰아 광주까지 가야 합니다.”
그런데 말을 재촉하면서 막 나루에 들어서는데 낯선 사람이 행길에 쓰러져 있었다.
“마부 아저씨, 저기 사람이 쓰러져 있는데 잠깐 말을 멈춰 보십시오.”
보의사 선교사는 말을 길가에 세워 놓고 쓰러져 있는 사람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쓰러져 있는 사람은 여자였으며, 손가락이 굳어져 있었고 눈썹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문둥이 아줌마다. 마부 아저씨, 저를 도와 주세요.”
보의사 선교사는 그 여인을 말 위에 태운 후 자신은 마부와 함께 걸어서 광주까지 갔다. 그런데 이 소식이 어느덧 광주 시내에 널리 퍼졌으며, 그 강퍅한 마음을 가졌던 최흥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됐다.
한편 오원 선교사 집에 도착한 보의사 선교사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