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영성의 대가, 조지 휘트필드

Google+ LinkedIn Katalk +

조지 휘트필드(J. Whitefield, 1714~1770) 목사, 영국의 타락하고 부패한 사회를 향해 권세있게 복음을 증거하던 위대한 설교자였다. 유럽에서 유명한 설교가였지만 요한 웨슬레처럼 교단을 만들거나 자신의 설교집을 출간하지도 않았다. 55세의 젊은 인생을 살았으나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그리스도를 향한 오직 뜨거운 열정으로만 교회를 섬겼다. 

휘트필드는 두 살 때 아버지의 죽음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학교를 중단하기도 했다. 네 살 때 홍역(紅疫)을 앓다가 눈 부위에 흉터가 생겨 사팔뜨기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러나 그는 신앙의 힘으로 가정의 불운을 극복하고 신체적 결함 때문에 좌절하지 않았다. 

18살에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부유층 자제들의 시중을 들면 근로 장학생이 될 수 있었다. 굴욕적인 대학 생활이었지만 근면 성실한 자세로 학업에 정진했다. 어려서부터 목사가 되겠다는 비전을 가졌다. 목회자의 소명을 확인하기 위해 수천 번을 눈물로 기도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한 후에 성직자의 길을 결단하고 스물 한 살 때 목사 안수를 받았다.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하고 5시부터는 말씀을 연구했다. 

그 당시 ‘사도 시대 이후 최고의 설교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다른 성직자들에게는 미움과 시기의 대상이었다. 

요한 웨슬레와 함께 미국 조지아주에 선교사로 갔다. 집회 때마다 드려진 헌금으로 조지아주에 고아원을 건축했다. 

국교회(國敎會)의 성직자들에 의해서 심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광신주의자(狂信主義者)로 음해(陰害)를 당하기도 했지만 복음을 위해서 일편단심으로 주님께 충성했다.  

1년에 1천 번 이상, 평생에 3만 번 이상의 설교를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회중(會衆) 수가 많을 때는 8만여 명이 모이기도 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각처에서 인파가 구름처럼 모였다. 광범위한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휘트필드의 성품은 지극한 겸손이었다. 그의 고백이다. “휘트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모든 사람의 발길 아래 짓밟히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화(榮華)롭게 될 수 있다면 내 이름은 모든 곳에서 죽어 없어지게 하고 내 친구들조차도 나를 잊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복(福)되신 그리스도의 대의(大義)가 증진될 수 있다면”. 이런 이유 때문에 그는 대부분의 설교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는 조직을 만들지 않았다. 후에 요한 웨슬레와도 결별했다. 그의 가장 큰 관심은 구원의 복음을 설교하는 사람들과의 연합이었다. 

광산촌에서 일하는 자녀들을 위해 학교를 세웠다. 그는 금욕 생활을 했다. 옷이나 신발, 음식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믿음으로 ‘양자(養子)의 영’을 받았음을 확신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사랑도 체험했다.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만이 구원의 길인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과의 교통을 방해하는 것을 죄라고 했다. 휘트필드는 말씀에 대해 경외심을 가졌다. 틈만 나면 독서를 했다. 자기 관리에 철저했다. 우리 한국의 목회자들이 휘트필드를 본받아 작금(昨今)의 교회 위기를 극복해 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