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여정] 가문과 가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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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가정이든 전통적인 인습에 관한 그 집안의 내력과 가풍은 늘 주변의 여러 사람들의 인연과 관계에서 관심의 초점이 될뿐더러 그 집안을 일컬을 때 다양한 면모가 회자되기도 한다.

이래서 어떤 집안의 대소사나 어떤 가정의 상황이 있을 때 그 집안을 먼저 보아라, 혹은 가문부터 우선 보고 나서 이야기하라란 말이 생겨나기도 한다.

나는 1941년 2월 2일 남원 양씨(南原 梁氏) 병부공파(兵部公波) 30대손으로 아버지 양재원(元在元), 어머니 박홍림(朴紅林)의 4남 중 2남으로 태어났다.

나의 기억으로는 증조할아버지께서는 내가 태어난 회남면에서 가장 부농으로 인격과 학식과 도량을 겸비하신 분으로, 당시 그 마을의 초임 원님이 부임할 때마다 제일 먼저 문안인사를 올릴 정도의 고매한 인격을 가지신 분으로 인근의 마을에 영향력과 존재감 있는 어른으로 존경을 받았다고 웃어른들이 늘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자랐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회남면을 비롯한 마을의 중요한 행사가 있거나 무슨 인근 지방의 큰 모임이 있을 때면 꼭 증조할아버지를 먼저 뵙고 상의하거나 의견을 경청하거나 뜻을 물을 정도의 학식과 품성을 갖춘 분으로 예우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할아버지께서나 아버지께서도 늘 증조할아버지의 덕목과 인성, 그리고 뜻한 바에 누가 되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스럽게 처신 행동해야만 한다고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아온 터였다.

또한 증조할아버지께서는 당시만 하더라도 충청북도 도청에 근무한 신시대의 학자풍의 면모를 가지신 선비로 관직을 정년퇴임하면서 정이품 벼슬을 하시다 농지를 하사받아 회남 땅에 퇴직금으로 큰 농지를 구입하시어, 당시만 하더라도 여러 소작인을 거느리며 존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지만 가훈으로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보증만은 절대 서지 말라’는 유훈을 남기실 정도로 자산 관리와 남의 시비나 송사에 휘말리지 않도록 생시에 각별한 당부를 하셨다고 한다. 왜냐하면 윗 할아버지께서 보은에서 알아주는 유지요, 학식과 인품을 두루 겸비하신 분으로 평소에 불쌍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을 돕느라 보증을 많이 서 일부는 그들의 사정으로 혹은, 여러 정황으로 본의 아니게 이용당하는 수모를 겪어 많은 재산상 손실을 입었기 때문이요, 본의 아니게 명성에 먹칠을 하거나 여러 고민의 사유가 되었으므로 이 신조는 각별히 자손들에게 당부한 터라 지금도 대대로 이 말씀은 우리 자손들이 필히 간직하는 유훈이 되고 있다.

그만큼 남을 신용하고 어려움에 처한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주셨던 분이셨다.

아버지께서는 3대 독자로 단독으로 훈장을 두고 공부하시며 한때는 당시의 이름 있는 유가 출신의 선생님을 모시고 과외공부에 정진할 만큼 학문을 소중히 하셨다.

더구나 초연한 기품에 올곧은 미래관을 가지신 당당한 기개를 지니신 분으로 내가 언뜻 어깨 너머로 보아온 여러 두툼한 한문학의 서적들이 쌓인 방에서 늘 공부하시며 가끔 뜰에 나오셔서 멀리 바라 보이는 국사봉과 근처의 풍광들을 바라다보시던 초연하시던 기품은 나한테는 어떤 신비한 인물로 우러러 보이는 도학자처럼 더할 수 없는 존경심으로 돌아왔다.

당시만 하더라도 시골의 벽촌이라 제대로 된 학교 하나 없이 교육 수준이 너무나 낮고 미비해 나 또한 앞으로의 학문의 수업에 대해 늘 고민하던 터였다.

더구나 대대로 보아온 조상님들의 학문의 높이를 더하는 여러 경지와 면모를 보아온 터라 나도 또래가 가는 정상학교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회남국민학교를 졸업하고는 진작부터 한문학을 기초로 한 여러 학문적으로 앞선 깊이와 높이를 공부하느라 근처의 제법 고명한 한학자로 이름을 날리던 분이 훈장으로 계신 서당에 다녔었다.

당시의 스승님은 내가 워낙 부지런하고 열심히 모든 것을 배운 그대로 깨우치며 학습하는 왕성한 향학열을 익히 아시고는 학동들에게 늘 나를 모범학생으로 칭찬하시며 더욱 총애하셨다.

말하자면 당시만 하더라도 모든 교육시설이 낙후되고 배움의 과정 마저 수준이 걸맞지 않게끔 교과과정도 보통기준인 천편일률적인 학습 문화로 일관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이런 오지의 농촌벽지에서는 도저히 미래가 없다고 보고, 선대부터 소위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가정교사식의 이름 있는 한학 선생을 모시고 독학으로 앞선 문물을 깨우치는 공부로 독자적인 학문 세계로 몰입하기로 한 것이다.

말하자면 도시에서 공부하는 학생들보다 앞서가겠다는 포부와 신시대문물과 당시만 하더라도 동북아를 호령하던 중국 선문화에 보다 빨리 접근 적응해야 앞서갈 수 있다는 지배적인 생각 때문에 한학에 더욱 온 힘을 기울이며 집착할 때였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학에 뿌리와 기초를 둔 성리학과 인문학이 동양권의 학문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던 시대였다.

세분해서 설명하자면 충청도지방과 경상도 일대의 유림들이 전성기를 누리며 조정에서 득세하던 이조시대의 뿌리와 최후까지 남은 신식교육문화가 제도적 원형으로 자리잡고 인정받기 이전까지 활동하던 무대가 나와 우리 집안의 선대들이 남보다 좀더 앞서가기 위한 희망적 미래관으로 고수하던 그 당시와 일맥상통하던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가정은 평화롭고 조용했으나 기품과 기개와 품위 있는 유가풍이 지배하고 있었으며, 어떻게 하더라도 자손들의 교육문화만큼은 선지식 선문화를 빨리 깨우치는, 당시만 하더라도 우월하던 교육체계인 한문학을 고집하고 있는 분위기가 온 집안을 압도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양한석 장로

• 문현중앙교회

• 시인 

•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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