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교회의 시련과 김익두 목사의 순교
신앙의 길을 지킨 한국교회 최초 부흥사
8·15 해방이 되었으나 나라는 분단되었다. 김일성이 북한을 공산주의 국가로 형성했다. 1947년 9월 소위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탄생된 후, 김일성과 강양욱은 반공사상의 온상인 기독교를 조직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결성한 ‘조선기독교도 연맹’을 범국가적 기독교 단체로 확대 개편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교역자들에게 가입할 것을 요구하더니 1948년부터는 일반 신도들의 가입도 요구했다.
북한교회는 다음 세 가지 선택의 길에 섰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월남하거나, 북한에 머물면서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하거나, 강양욱 목사처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해 김일성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외종숙인 강양욱은 북한에 있던 2천여 교회를 공산정권에 편입시켰다. 1943년 제38회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조선기독교도 연맹’의 설립을 주도하고, 1946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조선 기독교도 연맹의 위원장을 맡았다.
하루는 교회 제직들이 김익두 목사에게 몰려와 “목사님, 저들이 우리를 한데 묶어 활동을 제재하려고 하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고 물었다. “우리가 저들과 싸우는 길은 두 가지요. 밖에서 싸우는 것과 안에서 싸우는 것이요. 지금 우리의 여건으로 볼 때 밖에서보다 안에서 싸우는 게 유리할 것 같소.” 제직들은 김익두 목사의 의중을 알 수 있었으나 기독교도 연맹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는 교역자들이 신경쓰였다. “그러나 순교를 각오하고 연맹에 가입하지 않으려는 목사들도 많아요.”
“그건 물론 장한 일이오. 그렇지만 누구나 순교할 수도 없고, 또 그렇게 돼서도 안 돼요. 다 죽고 나면 양 떼들은 누가 이끌어 가겠소?” 제직들은 김익두 목사의 이런 고충을 헤아려 기독교도 연맹에 이름을 올리기로 했다.
그런데 이듬해 봄이었다. 하루는 민청에서 청년 몇 사람이 김일성의 사진을 들고 신천(信川) 김익두 목사를 찾아와서 교회 안에 걸라고 했다. 김익두 목사는 기가 막혔다. “대체 누가 이 사진을 우리 교회에 걸라고 하던가?” “그건 알아서 뭐합니까? 국민으로서 국가 원수의 사진을 거는 게 이상할 것 없잖아요.” “나는 못 걸겠네! 강양욱에게 가서 내가 못 걸겠다고 전하게.”
이 광경을 목격한 교인들은 김익두 목사에게 머지않아 큰 변이 생길 것 같아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며칠 후에 강양욱이 승용차를 타고 와서 김익두 목사를 극진히 모시는 것이었다. “대체 어디로 가는 겁니까, 강 선생?” “방송국에 가서 연설을 좀 해야겠습니다.” “갑자기 연설이라니요?” 김익두 목사는 방송 연설을 거절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김익두 목사에게 큰 박해가 올 것이었다.
당시 김익두 목사는 기독교도 연맹에 강제로 가입되었고, 1949년에는 기독교도 연맹 총회장에 임명되었다. 이는 그의 제자이자 김일성의 이종사촌인 전(前) 목사 강양욱(康良煜)의 강권과 감언이설에 의한 것이었다.
김익두 목사는 1950년 10월 14일 신천(信川) 교회에서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던 중 후퇴하는 인민군이 난사하는 총에 맞아 순교했다. 그의 나이 76세였다.
김익두 목사는 한국교회의 최초 부흥사였다. 그의 10년에 걸친 부흥회는 1907년 성령운동을 크게 번져나가게 했으며,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왔다. 또한 그의 이적을 통해 고침을 받은 이들이 많았다.
김익두 목사는 무려 50여 년 동안 국내, 만주, 시베리아 등지를 두루 다니면서 총 776회의 부흥회를 인도했고, 1만 명의 질병을 치료했고, 150개 교회를 개척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