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목회, 나의 일생] 선교 140주년 선교유산 탐방 : 서상륜과 새문안교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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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땅 서울에 복음을 전하리라 다짐한 서상륜은 “난 두렵지 않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고 선언하고 고려문을 통과하다가 성경을 모조리 빼앗기고 투옥, 능지처참을 당할 위기를 맞는다. 고려문 관리 중 김효순이란 분이 있었는데 그는 서상륜의 고향 친구 겸 서상륜 가정이 부자로 잘 살 때 하인(머슴)으로 있던 분이었다. 서상륜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밤중 말 두 필을 구하고 성경책 10여 권을 빼내 만주로 도망을 나온다. 

황해도 소래교회에서는 조그만 예배당을 지어 입당하던 날 서경조는 한국인 최초로 장로로 장립되고, 이 무렵 그의 아들 서병조(서상륜은 딸 하나만 낳음, 서상륜의 아들로 입양됨)는 한국인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는다. 

사실 서상륜이 먼저 장로가 되어야 하지만 서상륜은 어린 나이에 할머니의 강권에 의해 혼인을 하고 곧바로 이혼을 한다. 후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하지만 이혼한 여인을 찾아 집을 지어주고 평생 생활비를 주었다고 한다. 서상륜은 이 일을 큰 잘못으로 여기고 장로가 되는 일은 사양했고 목사로 헌신하지 않았고 평신도 전도자로 평생을 살고자 했다. 소래교회 설립의 기쁨을 얻은 서상륜은 권서인으로 들어와 성경을 나누며 복음을 전하고 서울에도 교회가 설립되기를 기도했다. 

권서인들이 성경을 공짜로 뿌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정가가 매겨져 판매하지도 않았다. 형편에 따라 쌀, 보리, 고구마, 감자 등 곡식을 얼마 내거나 옷감을 주면 성경을 나누었다. 

서울에서 복음을 전하고 많은 열매를 거둔 서상륜은 존 로스의 소개 편지를 들고 정동의 언더우드를 만나게 된다. 드디어 1887년 9월 27일(화요일 저녁) 서상륜과 언더우드가 씨줄, 날줄처럼 만나 서울 최초의 선교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게 된다. 

그동안 서울에서는 선교사나 외국인들 중심 영어 예배만 있었다. 이날 설립 구성원 한국인 14명 중 13명은 모두 서상륜이 전도한 사람이었다. 이들 중엔 소래교회에서 온 성도들도 5~6명이 있었다. 이날 때마침 서울에 와 있던 존 로스 선교사도 설립 예배에 참석하고 그날의 감격을 전하고 있다. 그가 쓴 보고서에 의하면, 설립 그날부터 1명의 세례식, 2명의 장로 피택, 그다음 안수식 등으로 이어졌다. 다만 누구인지 이름은 없어 참 아쉽기만 하다. 

설립된 교회는 처음엔 정동교회 혹 서대문교회 등으로 불리다 지금의 예배당 자리로 이전을 하며 돈의문 안쪽, 돈의문을 새문이라 불렀기에 새문안교회, 신문내교회로 부르기 시작했다. 새문안교회는 어머니 교회라고 할만큼 한국교회 목회의 출발지라고 할 수 있다. 

언더우드는 한국  찬송가의 시조이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장로교회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2신조 등의 출발지로 언더우드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다음 편에 계속)

류영모 목사

<한소망교회•제 106회 총회장•제 5회 한교총 대표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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