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가 꿈꾸는 여인상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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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결혼한다면

영적인 번뇌와 함께 주어진 신학 연구 활동의 과중한 부담으로 나는 더 이상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때였다. 내게 다가오는 결혼 문제는 그림의 떡같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상황은 항상 이성적 판단과는 다르게 전개되고 기회는 기적처럼 오는 법이다. 집이나 돈이나 심지어 갈아입을 옷조차 없는 가난한 신학생에게 결혼은 하나의 사치스런 것이라고 여겨지던 그때, 나와 결혼하자는 여성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엇을 보고 나를 좋아하고 따르는지 몰랐다. 내가 시각장애인이었기에 가끔 나를 안내해 주는 줄로만 알았던 터라 연애 감정 같은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처지였다.

어느 날 모 교회 성도에게서 정식으로 중매가 들어왔다. 나는 아직 결혼을 위해 기도해 본 적이 없고, 현재 내게 결혼이 그리 중요한 문제로 떠오르지 않는다면서 정색하며 거절했다. 하지만 중매 그 자체는 그리 싫지 않았다.

나는 막연하게나마 ‘내가 결혼할 수만 있다면’ 하는 가정법 속에서 그려 오던 이상적 여성상은 있었으나 막상 그 상대가 그리 쉽게 나타나리라고 믿지 않았다. 우선 경계심이 앞섰다. 신학생 시절에 연애하거나 결혼하는 것은 내게는 적어도 하나의 금기 사항이었다.

나는 그날 밤 성전에 나아가 처음으로 결혼 문제에 관해 주님께 진지하게 질문하며 깊은 명상에 잠기게 되었다. 내가 과연 어떤 여성을 맞아 결혼해야 할지 성품이나 인격 등 여러모로 생각해 보았다.

흥분된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고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고요한 확신이 일어났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일이고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그저 순종하겠습니다”라는 신앙 고백을 드리고 예배실을 나왔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나마 소박한 생각은 있었다. ‘잃어버린 가정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부모님이 함께해 주셨던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가정을 떠올리면서 언젠가 나도 이와 같은 가정을 꾸며 보겠다는 꿈 같은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나의 동료들은 과반수 이상 결혼해 이미 자녀들을 몇씩 둔 가장들이어서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가끔씩 동료들의 결혼식에 초대되어 갔던 기억이 난다. 수많은 교우들의 축복 속에서 진행되는 거룩한 결혼 예식은 가나의 혼인 잔치를 축복하신 주님의 성사(聖事)처럼 느껴졌다.

내 일생에 단 한번밖에 없을 거룩한 성혼 잔치를 위해 준비된 신부는 과연 누구일까? 나는 점점 더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젊었던 시절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아름다운 미소와 단아한 모습을 지닌 그분은 나의 영원한 모성이요. 그리운 여성상이었다.

나의 반려자요 생의 동반자를 얻을 때는 풍부한 여성미를 지닌 착한 사람을 맞고 싶어졌다. 비록 내 눈은 빛을 잃었지만 나의 동반자는 장애자가 아니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게 과연 온전한 여성이 시집을 올까 싶기도 했다.

신학교 졸업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계속 중매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신학 연구나 목회 훈련을 통해 사역자가 될 수 있다 자신감이 생겼던 터라 몇 차례 선을 보게 되었다. 나와 함께 목회 동반자가 되어 줄 수 있는 여성이 나타난 것은 정말 꿈 같은 일이었다.

어느 날 신앙 좋고 인물 좋은 미인이 있으니 한번 만나 보라는 유완선 동기생의 소개로 뚝섬 근방 허름한 중국집에서 네 사람이 만났다. 소개하는 친구는 신부될 사람이 음악에도 소질이 있고 신앙의 전통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규수란 점을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신붓감과 나는 단둘이 만났다. 나는 그녀에게 나의 형편과 처지를 상세히 말했다.

“나는 집도 없고 가진 것도 없는 무소유한 사람이며 또한 앞도 보지 못하는 시각장애인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기차 위에 꿈과 희망을 싣고 있는 가난한 신학생으로, 앞으로의 삶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다.”

내 소개를 들은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돈이 부족하면 절약해서 쓰면 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감사한 마음으로 쓰면 됩니다.”

나는 두 번째 그녀의 신앙관을 물어보았다.

“만일 공산군이 공격해 오는 상황이 된다면 신앙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니면 공산주의를 선택하겠습니까?”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신앙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다시 말하면 순교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나는 감동했다. 몇 번 만난 뒤 우리 두 사람은 결혼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기도한 후 부모님의 승낙을 받기로 했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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