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과를 만드셨고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다. 원래는 남자만 창조하셨는데 그의 고독함을 보시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그의 옆구리에서 하와를 탄생시켰다. 이는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 있을 때 옆구리 창 자리에서 흘린 피와 물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가 됐음을(요 19:34-36) 증명해주는 말씀이 아닐까?
여호와께서 에덴동산에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게 생명을 주셨다. 이렇듯 인간의 영혼에게도 영생을 주셨기에 천국에 입성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 것이다. 비록 육체는 본래 흙으로 지음을 받았기에(창 2:7) 부득이 자연인 흙으로 되돌아가지만, 하나님께서 코에 생기를 불어 생영이 된 영혼이기에 하늘나라의 소유권을 인정받은 것이다.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가 있다.(창 2:9) 왜 하필이면 선악과를 동산 한 중앙에 있게 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열매였을까. 애초에 먹지 못하게 하려면 하찮은 과일처럼 볼품없게 보였다면 좋았을 것인데 어찌 우리를 유혹하는 과일이었을까?
인간에게 죄를 짓게 하려는 덫이 아니었을까. 여호와의 진정한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인이시오, 절대자이시다. 주인이요, 절대자는 결코 실수가 없으신 분이다.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도록 놓아두었을까. 그 해답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명쾌한 해답이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지 않았다면 생명이 없는 로봇일 뿐이다. 인간이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말도 이에 의하면 거짓이다. 인간은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따먹을 수도 있고,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 따먹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편을 택할 것이냐 하는 것은 오직 자신에게 주어진 몫이다. 선택은 자유의지에 의해 결정된다. 누구의 구속이나 제약도 받지 않고 스스로 결정해야 하기에 그 결과도 자신이 지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주어진 선택에 따라 결정된다. 선택의 결정이 매우 어렵기에 이를 불교에서는 고해(苦海)라고 했다. 우리의 삶 전체가 고난의 연속이기에 고해란 용어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의 고통을 대략 열거하면 ‘소유를 위한 고통,’ ‘실망에 대한 고통,’ ‘증오에 대한 고통,’ ‘좌절에 대한 고통’ 등 수많은 고통이 뒤따른다.
원래 인간이란 행복 속에서는 진정한 그 가치를 모른다. 다만 고난을 통해서만이 행복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그랬다. 하나님께서 금지한 선악과를 그들은 그렇게 먹고 싶었을 때 뱀의 유혹을 받았다. 뱀의 말처럼 선악과를 따 먹고 나니 과연 하나님과 같이 지혜로운 존재가 되었을까. 죄상이 드러나 부끄러운 나상만 보였다. 그 수치를 가리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 훗날 도덕과 윤리가 발생하게 됐다.
이것을 잘 말해주는 한자가 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싶었던 식욕은 몸이기에 「몸기」자와 그 심리를 간교하게 유혹시킨 뱀이기에 「뱀사」의 한자였다.. 「몸」기 (己)와 「뱀」사 (巳)의 한자 형태는 신기하리만큼 비슷하다.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의도로 이루어졌을까? 아무튼 성경은 진정 진리의 기록이다.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 은퇴
수필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