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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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흥종과 선교사들 헌신, 광주서 복음 전파^나환자 사랑

“선교사님, 조금 전에 오원 선교사는 눈을 감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일찍 오셨어도…”

이 말을 들은 보의사 선교사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오원 선교사는 1909년 4월 3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배유지 선교사님, 큰일났습니다.”

배유지 선교사를 돕고 있던 조사들의 음성이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누가 찾는다기에 밖으로 나가 보았다. 그랬더니 광주 시내를 주름잡고 있던 최흥종과 그의 부하들이 서 있었다.

“아니,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배유지 선교사님과 의논을 하려고 왔습니다.”

최흥종의 의사를 눈치 챈 조사는 곧 배유지 선교사에게 그 뜻을 전했다. 그리하여 배유지 선교사의 집에 30여 명의 청년들이 다 들어갔다.

“야, 모두 선교사님께 인사해.”

최흥종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세 줄로 서서 그들은 큰절을 했다.

“선교사님, 예수의 사랑이 얼마나 크기에 병든 문둥이 환자를 말에 태우고 광주까지 옵니까? 우리들은 그 이야기에 감동이 되어 주먹을 버리고 예수의 사랑을 배우려고 왔습니다.”

배유지 선교사는 이 말에 깜짝 놀라 그들에게 예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해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최흥종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 다음 주일부터 북문 안에 있는 북문안교회 교인들이 됐다.

북문안교회는 계속 부흥되어 가고 있었다. 이미 앞에서 언급했지만 1904년 12월 25일 성탄절에 하나님의 은혜로 광주교회가 설립됐으며, 다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북문 안으로 이전하고 그 이름을 북문안교회 또는 광주읍교회, 광주부교회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최흥종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북문안교회에 출석하자 광주 시내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 깡패가 교회를 다녀? 거기 무슨 신통력이라도 있는가봐.”

“아니야, 예수의 사랑이 그렇게 크대.”

광주 시내에 사는 사람들은 만나면 최흥종에 대한 이야기로 술렁거렸다. 그렇게 보의사 선교사의 그 뜨거운 사랑에 감동이 되어 자연히 북문안교회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윌슨 선교사와 최흥종 목사

최흥종은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게 됐으며, 그의 동생 최영욱은 새로 출발하는 숭일학교에 진학을 했다. 그리고 광주선교부에서도 최영욱을 광주 지방 의사로 지역사회에 봉사할 수 있도록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하게 했으며, 졸업하자 광주선교부의 책임자였던 배유지는 미국 유학까지 후원했다.

그리하여 호남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남장로교 총회의 장학금으로 도미해 의학을 연구하게 됐다. 그런가 하면 최흥종은 보의사 선교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시내 봉선동에 있는 나환자촌을 드나들면서 나환자들을 돕는 좋은 협력자가 됐다.

봉선동에 있는 나환자촌은 보의사 선교사가 나주에서 데려온 문둥병 환자를 치료해준 곳으로 봉선동 옹기그릇을 굽는 가마솥이 있던 자리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2주도 못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영원한 하늘나라로 갔다.

오원 선교사가 세상을 떠나자, 광주는 물론 그의 선교 구역이었던 전남 동남 지방에 있던 교인들은 많이 섭섭해 했다. 한편 윌슨(Dr. Robert M.Wilson, 1880~1963, 한국명:우월손) 선교사가 광주 지방 의료 선교사로 1908년에 부임했다. 보의사 선교사에 의해 나환자가 치료를 받다가 세상을 떠나자 윌슨 선교사는 보의사 선교사의 그 희생적인 정신을 광주에 계속 계승하기 위해 나환자 진료소의 소장으로 취임하고 치료를 받은 나환자를 봉선동 마을에서 살게 했다.

“윌슨 선교사님, 저는 기술은 없지만 선교사님이 시키는 대로 나환자를 돕겠습니다.” 이 말에 감동을 받은 윌슨 선교사는 최흥종을 봉선동에 있는 나환자 진료소에서 나환자를 돕는 일에 헌신토록 했다.

최흥종은 주일이 되면 배유지 선교사가 시무하고 있는 광주 북문안교회를 드나들면서 배유지 선교사를 도왔다. 북문안교회 교인들은 1912년 교회의 초대 교인인 김윤수 집사와 함께 최흥종을 장로로 선출하고 장로로 세웠다.

배유지 선교사는 최흥종 장로의 신앙에 감동되어 평양에 있는 장로회신학교에 진학하게 했다. 최흥종 장로는 평양과 광주를 오르내리면서 신학을 공부하면서도 광주 나환자촌을 계속 도왔다. 

1917년 그가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자 배유지 선교사가 북문밖교회(현 광주중앙교회)를 설립하고 그 교회 담임 교역자로 부임했으며 최흥종 장로는 평양과 광주를 오르내리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더욱이 광주에서 갑부로 알려진 현준호의 협력을 얻어 교회 내에 청년야학교를 개설함과 동시에 유치원도 개설했다.

그런가 하면 1919년 그가 3학년에 재학 중일 때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원래 그는 광주 지방 3‧1운동에 참여하기로 하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된 최흥종은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의 형을 받고 옥살이를 했다.

이 일로 그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졸업이 늦어졌으며, 1921년 9월 목사안수를 받고 얼마 후에 시베리아 선교사로 떠나게 됐다. 이때 광주중앙교회 교인들과 봉선동 나환자들은 선교사로 떠나는 그를 만류했지만 목회의 결의에 순종해야 한다면서 1923년 그를 떠나 보냈다.

그가 떠날 무렵 시베리아의 분위기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 만주 벌판에서는 우리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으며 만주 훈춘에서는 우리 민족이 수없이 일본 군인들에게 대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훈춘대학살사건이 국내에 알려지자 이를 취재하기 위해서 특파됐던 정덕준 기자마저 참상을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싸움이 치열하던 국경지대에서는 죄 없는 동포들이 학대당하고 처형당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때 최흥종 선교사는 러시아 당국에 찾아가 항의도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 그에게 남은 것은 생명의 위협뿐이었다. 더 이상 선교사로 활동할 수 없었던 최흥종 선교사는 광주 지방으로 내려와 윌슨 선교사가 원장으로 있는 봉선리 나환자촌으로 갔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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