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요즘 언제부터인가 TV뉴스를 시청하지 않는다. 핸드폰으로 실시간 뉴스를 접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치인들의 분노한 표정과 저급한 언어를 보거나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탄핵 반대와 찬성, 혹은 보수와 진보 간의 극단적인 대립이야 어쩔 수 없다 하자. 그리고 온 국민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거친 말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증오하는 것도 일시적인 격렬한 감정과 흥분의 표현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정당의 대표, 대변인, 국회 상임위원장과 같은 우리나라를 이끌어가는 엘리트 정치인뿐 아니라, 일부 종교지도자들이 욕설과 비방, 증오감으로 가득한 조롱과 저주성 발언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참담함을 느끼는 국민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어느 정당 대변인의 발언은 내란수괴, 졸개, 파렴치범, 난동, 가혹한 심판과 같은 혐오성 단어들로 가득하다. 국회에서는 자신의 선입견으로 미리 단정 짓고는 상대방에 대해 호통치고 입을 막고 분을 못 이겨 욕설을 퍼붓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어떤 종교지도자는 특정 정치인이 탄 비행기가 추락하기를 비는 저주성 발언을 SNS에 올렸다고 한다.
언어폭력은 말하는 당사자와 상대방의 마음을 모두 황폐하게 만든다. 이념이나 사상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자신은 옳고 상대는 악이라는 확신이 들 때조차도, 진정으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는 정치인이라면, 상대의 마음을 격동시키는 비열한 언어는 써서는 안 된다. 비열한 언어로 상대를 격동시키는 것은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하수 중의 하수의 방법이다. 정제되고 품격있는 언어로 촌철살인 정곡을 찔러야 상대를 마음으로 굴복시킬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분노를 미덕이라고 여기는 정치인으로 가득하다. 과거 문재인 전 대통령은 회의 석상에서 격노했다는 표현을 쓰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불의를 보고 분노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분노에 바탕을 둔 정의는 대개 증오와 독선과 폭력으로 끝난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질투심과 시기심의 발로인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가 정치를 바로 세우려면 언어를 정화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언어는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 언어를 순화하면 서로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한다. 그때 비로소 자신과 상대의 입장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비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에 있는 대들보를 빼야 세상을 바로 보고 비판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근대사를 보는 역사관에서부터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평가에 이르기까지 두 개의 세계관이 서로 충돌하고 있고 그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 냈지만, 아직도 여전히 민주적인 시민의식보다는 권위주의적이고 비민주적인 사고방식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 처지가 다르고 견해차가 존재할 때 민주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을 아직도 우리는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 부드러운 말로 분을 가라앉히고 평정심을 되찾을 때 비로소 견해차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서도 사도 야고보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고 말한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말로써 남을 살리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야고보서 3:17-18)
김완진 장로
• 소망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