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관중(1954- ) 씨는 전북 익산에서 전형적인 유교집안에서 4남 3녀 7남매 중 세 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경제적으로 쪼들림에도 불구하고 매일 이른 새벽부터 하루 종일 한숨 지며 담배를 피웠고 안주도 없이 술로 나날을 보냈다. 아버지가 내게 농사일을 강요해 견디다 못해 아버지 몰래 군대에 입영하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고 1975년 7월 부모님에게 내일 군대에 입대 한다고 하고 집을 떠나 군복무와 전역 후 기타생활이 무려 43년이 되었다. 아버지는 내가 군 복무 중 2년 후에 세상을 떠나셨고 생각지도 못했던 카투사에 배속 받아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해 포항제철에 입사를 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니 의사가 심장에 이상이 있으니 현재 상태로 방치하면 생명이 위태롭다고 심장전문병원에 가라고 했다. 그래서 신촌 세브란스병원 심장센터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대동맥 판막부전폐쇄증으로 수술비가 600-700만 원이 든다고 했다.
수술비를 감당할 수 없음은 물론 수술 후 회복에 대한 보장도 없어 수술을 포기하고 죽을 때까지 살다가 죽겠다는 마음으로 담배와 술로 빨리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나의 사정을 옆에서 안타깝게 지켜보던 누님이 주선해 포항 순복음교회에서 안수기도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굳게 닫고 있는 마음에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해 안수기도를 받아도 병이 치료될 수 없었다.
우리 집안이 유교 가정이었으나 누님이 독실한 기독교인 매형과 결혼한 후 어머니와 다른 형제들이 모두 교회에 출석했다. 그 후 누님의 주선으로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해 성공했다.
그는 출판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 어려움을 당했는데 ‘내게 실패는 있어도 포기는 없다’는 생각이었으나 부채가 점점 늘어나 감당할 수 없었다. 그런데 믿음이 독실한 분을 만나 “배추가 다섯 번 죽어야 김치가 된다”고 말씀하면서 도와줘 성화 그림이 선교의 도구가 되어 성공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 만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것과 마찬가지로 기적이 일어났다.
김광식 목사<인천제삼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