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부흥회 대표하는 ‘이적의 부흥사’
‘한국의 무디’로 평가… 영적 능력의 목사
그의 설교와 전도를 통해 258명의 목사가 배출되었고, 그중에는 한국교회 최초의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남궁혁 목사와 한국교회의 순교자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신앙인 주기철(朱基徹) 목사가 있다. 또한, 2만 8천여 회의 감동적인 설교로 많은 사람을 기독교로 개종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의 부흥회 설교 13편을 모은 《부흥회설교집》(1940년)이 남아 있다.
김익두는 초월적 신비주의 운동가로서 한국교회의 부흥회를 대표하는 ‘이적의 부흥사’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3·1 독립운동 뒤 민족적 좌절을 겪고 사회변화와 각종 이데올로기의 대두로 인해 의기소침해 있던 폐허의 한국교회에 영적인 각성을 도모해 위로와 희망을 주었으며, 신유(神癒) 신앙운동으로 재기의 에너지와 열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아울러 그는 19세기 말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무디에 비견해서 ‘한국의 무디’로 평가되었다. 또 안수기도로 병을 고치는 이적으로 ‘과학을 초월한 불가사의(不可思議)를 행한 자’, ‘신비의 잠을 깨운 자’ 등으로 불리며, 이후 한국교회의 독특한 부흥회의 전범(典範)을 마련한 영적 능력을 지닌 목사로 기억되었다.
김익두 목사의 부흥사경회 운동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대형 집회의 성격이다. 일제하에서 그의 부흥 강설회에 버금갈 만한 청중 동원의 거대한 집회가 따로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김익두 목사의 이적 기사를 의심했던 밀스(J.N. Mills) 박사도 서울 승동교회의 집회를 보고 “숨가쁠 만큼 인상적”이라 했으며, 북장로교 선교사 로즈(H.A. Rhodes, 魯解理) 박사는 “수도에서 열렸던 사상 최대 최초의 대집회였다”고 증언했다.
그의 성회는 어디를 가나 그 지방에서 전례 없는 인파에 휩싸이곤 했다. 가령, 1920년 8월 신천(信川) 성회(聖會)에는 남녀 수천 명이 밀려들어 교회당 뜰까지 인산인해를 이뤄서, 사경 시간에는 본 교회 신자들이 양보해서 불참하도록 권유했었다. 실로 그날은 장날을 방불케 했다. 실제 장사꾼들이 곁들여 장사 속셈으로 몰려들기도 했다.
또 그해 10월 연백에서도 집회 인원이 인산인해였고, 원산에서는 성경공부 때마다 수천 명씩 모이고, 병을 고친 자가 180명이었으며, 제주에서도 1920년 말인데 500여 명이 운집한 성황이었다. 마산에서는 1921년 설날의 성회인데도 때마다 수천 명씩 모여서 열기가 넘쳤다.
1920년 8월 사리원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는 무려 4~5천 명이 운집했는데 교회당 안팎이 인파로 덮였고, 심지어 담장 위까지 올라가서 설교를 듣는 교인이 많았으며, 예배당 대문 밖에는 음식점과 과일 장사들이 모여들어 임시 시장을 차릴 정도였다. 성진에 갔을 때도 같았다. 교회당에 모인 인원이 다 들어갈 수 없어서 보신여학교 앞뜰에 천막을 여럿 치고 개회했으나 운집하는 성도와 병자가 매일 수천 명에 달하는 대성황이었다. 김 목사가 가는 집회는 어디나 예외가 없었다.
다른 특징은 부흥사경회의 시간 배정인데, 대개 기본적인 원형이 하나 있었다. 새벽기도회, 오전 2~3시간에 걸친 성경공부, 오후 시간에 요리 공부, 그리고 저녁 시간에 설교회라 해 부흥회 핵심의 설교 전도가 있었다.
1933년 5월 19일부터 일주일 동안 개최된 새문안교회 부흥회는 시정이 꽉 차 있었다. 주야 일주일 전체를 그 교회에서 경청했으나 때에 따라 어떤 감정의 폭발, 외침, 눈물, 신체적 진동이 성회를 달구었다.
그의 십자가에 대한 시행과 보혈의 주제 설교, 회개에 대한 심판 모면의 권고, 능력의 성령이 폐부를 찌르는 그의 칼날 같은 호소력에 불이 붙으면 예배는 불같은 열기와 정서적 폭발로 휩싸여 눈물과 찬송이 넘쳤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