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내가 꿈꾸는 여인상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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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승낙을 받기까지

그런데 신부 어머님은 처음에는 우리의 결혼을 반대했다. 그 이유는 시각장애인이란 점과 양친 부모도 없는 고아요, 집도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낙심하지 않고 기도하며 결혼 승낙을 기다렸다. 그때 마침 그 모친이 급성 방광염에 걸려 내가 봉사하던 신학교 근방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치료받는 중에 꿈속에서 “앞 못 보는 목사 후보생과 결혼하는 일을 반대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 우리는 결혼 승낙을 받고 난 2개월 후인 1967년 신학교 2학년 가을학기 중간쯤 약혼식을 올렸다. 나의 아내가 될 사람은 나의 모든 처지를 알고 반려자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프로판 가스가 폭발하는 바람에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나는 상대방에게 내가 함께 일할 선교의 대상들과 살면서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익히고, 함께 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가 확인한 뒤 그렇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낸 다음 약혼했다.

약혼하자마자 그녀는 수유리에 있는 시각장애인 고아들이 수용되어 있던 임마누엘 여명원, 그러니까 현재의 한빛학교를 찾아갔다. 시각장애인 남편과 살려면 시각장애인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므로 우선 훈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만 2년 간 적응을 잘해 나갔다.

드디어 결혼할 날을 받게 되었다. 1968년 12월 23일, 그 날 역시 내 생애에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그러나 결혼식을 앞두고 예상하지 못한 또 하나의 불행한 사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식 전날 일어난 기적

결혼식 전날 나는 기숙사에서 졸업 논문과 학기말 시험을 준비하다가 신학교 강당에 가서 새벽 기도를 마치고 방에 와서 라디오를 틀었다.

남대문 개방 시장에서 화재가 나서 상가가 전부 불타게 되었다는 보도가 흘러 나왔다. 화재가 난 장소는 바로 나의 신부 될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그 당시의 여건으로 보아서는 도저히 살아 남을 가능성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태연하게 두 시간 수업을 끝내고 친구들과 함께 결혼식 장소인 성도교회로 향했다.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고 계시는데 나의 신부를 불에 타 죽게 내 버려두시지는 않으리라고 믿었다. 모태로부터 주님을 섬긴 가정이고 그의 외조부도 황해도에서 훌륭한 부흥 목회를 했던 분인데 설마 불행한 일이 일어나랴 싶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줄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걱정스러웠다.

나는 평소 입던 옷을 다려 입고 결혼식 장소로 가서 신부를 기다리고 있었다. 축하객들이 한 분 두 분 오기 시작하는데 문제는 신부가 화재 사고 때문에 안 나타나면 무슨 망신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얼마를 지났을까. 신부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타났다. 나를 보자마자 감격하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셔서 우리를 도와주셨다고 하면서 감사기도를 드리셨다.

사실 신부가 사는 바로 앞집에서 화재가 나서 그 일대를 모두 태웠는데, 불길이 신부 집 이층을 지나갔으나 남대문 시장 C, D동 과 상가 좌우로 몇 집을 남기고 그 상점은 타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적적인 일이었다. 내가 며칠 후에 신부의 집에 들렀을 때 벽이 불에 달아 아직 식지 않고 뜨끈뜨끈했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순간을 모면한 것이다.

나는 신부에게 말했다.

“남들처럼 제주도나 경주, 수안보나 설악산으로 신혼 여행을 가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왜요?”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맺어 준 부부이기에 하는 말이오. 차라리 우리 신혼 여행은 임마누엘 여시각장애원으로 갑시다.” 

“임마누엘 여시각장애원요?”

“그래요. 그곳에는 부모 없는 고아들이나 부모가 있어도 버린 고아들이 사는데,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우리가 직접 보지 않았소. 그러니 그들은 우리가 돌보아야 할 우리의 형제 자매요, 자녀들이 아니겠소.” “그러시지요. 그게 더 큰 의미가 있겠네요.”

신혼 여행은 임마누엘 여시각장애원(고아원)으로

결국 결혼 예식 후 축하연을 마친 다음 우리는 수유리에 있는 임마누엘 여시각장애원으로 신혼 여행을 떠났다. 나는 행복한 첫날을 사랑하는 시각장애인 형제 자매들과 보낼 수 있었으므로 가장 신나고 행복한 신혼 여행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나와 함께 한 신부가 일평생 동안 그들과 동고동락하기 위해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실현시킨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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