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7년 11월 5일부터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그스문트(Sigismund. 1368~1437)의 요청으로 공의회(公議會, 추기경, 주교, 신학자들이 모이는 종교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가톨릭은 세 명의 교황(로마의 그레고리 13세, 아비뇽의 베네딕토 3세, 알렉산데스 5세)이 난립해 정통성을 다투는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 혼란 사태를 해결하고자 공의회가 열린 것이다. 또 다른 한 가지는 체코의 프라하 대학 총장 얀 후스(Jan Hus, 1370~1415)를 단죄(斷罪)하고자 했다. 후스는 영국의 신학자, 교회 개혁파였던 존 위클리프(J Wycliffe, 1330~1384)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였다. 후스는 공의회의 소환령에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지그스문트 황제에게 신변 안전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다. 황제는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공의회가 열리는 콘스탄츠에 도착하자 그의 신병(身柄)을 구속, 이단 재판에 회부되고 말았다.
후스의 혐의는 성(聖) 삼위(三位) 하나님 외에 자신이 신의 제4 위격(位格)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논문과 저서는 불태우도록 판결했다. 성직을 박탈하고 유품(遺品)도 불태워졌다. 당시 가톨릭의 성찬식 때 성직자는 빵과 포도주를 다 들었지만 일반 신자는 빵만 들었다. 포도주를 바닥에 흘릴 위험이 있다는 이유에서 배제되었다. 후스는 성직자나 일반 신도는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인식으로 똑같이 배찬(配餐)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후스는 화형대(火刑臺)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시편 21편을 소리 높여 낭송(朗誦)했다. “여호와여 왕이 주신 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리이다.” 이어서 51편을 낭송했다. “하나님이시여 주의 인자(仁慈)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除)하소서.” 자신을 화형(火刑)으로 몰아 넣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기를 기도했다. 형리(刑吏)가 기둥에 불을 붙였다. 후스의 시신(屍身)은 라인강에 내다 버렸다.
종교 개혁의 사실상 기원은 15세기 얀 후스의 체코 종교개혁에서 시작되었다. 16세기 루터, 츠빙글리(H Zwingli,1484~1531), 칼빈(J Calvin,1509~1564) 등의 개혁은 2차 종교 개혁이었던 셈이다. 후스의 신학은 오직 성경에 바탕을 두었다. 가톨릭의 전통(전승)보다 성경의 권위를 중시했다. 교회의 수장(首長)은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구원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이 후스의 주장이었다. 후스는 처형된 후에 체코의 민족적 영웅이 되었다.
존 위클리프는 영국에서 태어났다. 1572년 보헤미아(체코)에서 출간된 책에 이런 그림이 있다고 한다. ‘위클리프가 부싯돌로 불을 붙이고 보헤미아의 얀 후스가 그 불을 석탄으로 점화(點火)하고 루터가 불이 붙은 횃불을 치켜 든그림’이다. 라틴어 성경만이 있던 당시에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1382) 위클리프는 하나님만이 최고의 지배자이시며 피조물인 인간은 주님의 종일 뿐이다.
교회는 성령에 바탕을 둔 조직이다. 교회가 부패한 것은 고위 성직자, 수도사, 사제(司祭)들이 소유한 부(富)에 있다. 교회의 머리는 교황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교회는 국가에서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위클리프는 교회가 조세를 징수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교회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최종, 최고의 기준은 성경이다. 옥스퍼드 대학은 위클리프를 보호했다. 그러나 1428년 위클리프의 묘(墓)가 파헤쳐지고 그의 시신(屍身)이 회형(火刑)을 당했다. 후스의 역사관(歷史觀)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인간은 부패하고 타락한다는 하강(下降)역사관이다. 연옥(煉獄)의 존재를 믿었다. 제자들은 예수를 “주여”라고 부른다. 그러나 유다만은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을 적대(敵對)하는 자이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