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암 전재규 장로, 신앙과 의술로 걸어온 길
의료인·교육자·역사가, 그중 제일은 신앙인

백암 전재규 장로(대구 서현교회)
들어가며
백암(白岩) 전재규 장로는 신앙과 의술을 조화롭게 실천하며 평생을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의료인으로서 환자를 섬겼고, 신앙인으로서 교회를 위해 헌신했다. 그의 삶은 그리스도인의 모범적인 신앙 여정으로 평가받으며, 최근 그의 생애를 조명하는 평전이 출간되며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다.
대신대학교 직전총장이며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운동본부 이사장으로, 의료 및 교육 전문인선교에 크게 공헌했다. 학문과 의료 시술 및 병원의 근대화와 신학대 발전을 위해 헌신해왔다. 대구 동산의료원에서 31년간 의사로서 동산의료원 전도회장, SIM 국제선교회 한국 대표이사, 선교회 후원회장, 호스피스 사단법인 이사장, 해외진료 선교 등 의료선교활동과 직장선교 활동에 힘써왔다. 미국 클리블랜드 한인교회도 세운 바도 있다.
대신대학교에서 교수로서 신학영어, 치유선교학, 노인목회학, 호스피스 사역 등을 가르쳐왔고, 총신대학교와 대신대학교 이사와 석좌교수를 거쳐 2009년도에는 대신대학교 총장직을 통해 대학발전에도 기여했다. 총 30여 권의 의학, 신학, 역사 서적을 집필, 2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반 서적으로는 ‘네 집이 평안할지어다’, ‘대구 3.1독립만세운동의 정체성’, ‘의사의 눈으로 본 십계명’, ‘대구는 제2예루살렘’ 등을 출간했다. 그야말로 교육(Teaching), 선교(Preaching), 치유(Healing) 사역을 담당하신 예수님을 닮고자 노력한 삶이었다. 사단법인 대한민국역사문화운동본부를 설립하여 역사문화운동에 관심을 갖고 복음 전파와 대구 성시화에 기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사역들을 10여 년간 주도해오고 있다.
젊은 시절과 의료인의 길
전재규 장로는 1937년 경북 칠곡에서 5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전 장로는 “영수였던 외할아버지의 신앙을 물려받은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모태신앙으로 자랐다. 초등학교(당시 초등학교) 2학년에 해방을 맞이하고 6학년이 되면서 대구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며, “청소년기에 학교 외에는 교회 생활에만 전념하며 각종 기도 집회, 새벽기도 등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영적으로 뜨거운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군대 시절을 말하며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허송세월을 보내고 오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영어책을 들고 입대를 했다. 양구에 있는 부대에 갔더니 잘 지어진 연대교회가 있었는데, 군목이 없어 개점휴업 상태인 것을 보고 마음에 울림이 있었다”며, 전재규 장로는 “예배는 드려야 하고 교회는 비어 있으니 내가 목회를 맡아서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평일에는 의무장교로 복무하면서 주말마다 성경 공부를 하고 매 주일이면 설교를 했다”고 밝혔다. 이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이후 미국에서 6년간 유학하며 클리블랜드 병원에서 전문의 과정을 밟았으며, 귀국 후 대구 동산의료원에서 마취통증의학과 의사로 30여 년간 근무하며 한국 의학 발전에 기여했다. 당시 의료 환경이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자 치료를 위해 헌신하며 후배 의사들을 양성하는 데에도 힘썼다.

젊은 시절 만세운동 재연에 참가한 전재규 장로.
신앙과 교회 헌신
전재규 박사는 평생을 신앙의 길을 걸으며, 기독교 신자로서의 삶을 실천했다. 전 장로는 대구 서현교회에서 31년간 시무장로로 섬기며 교회의 발전과 지역사회 봉사에 앞장섰고, 이후 원로장로로 추대됐다. 그는 단순히 교회 직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 아니라, 성도들의 신앙 성장을 돕고 복음 전파에 힘썼다. 또한 기독교 신앙을 기반으로 한 사회 봉사와 역사 연구를 통해 한국 기독교의 정체성을 찾고, 그 가치를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대구 서현교회가 동양 최대 예배당을 건축할 당시 원석 대리석 구입 등으로 동참했고, 나이지리아에 선교사를 파송할 때 개척교회 및 신학교 설립 등에도 헌신했다. 대구 서현교회 성도들은 전 장로가 있기에 교회가 더욱 빛난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이처럼 신앙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온 그의 모습은 많은 성도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첫째 아들 가족과 함께.
교육자로서의 발자취
의사로서 은퇴한 후, 그는 대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신학 교육과 후학 양성에 힘썼다. 전재규 장로는 “제 교육 철학은 단순한 학문적 지식 전달이 아니라, 신앙을 바탕으로 한 인재 양성이었다. 기독교적 가치관을 중심으로 교육의 방향을 정립해 학생들을 교육하려 했다”고 했다.
전 박사는 신앙과 학문을 넘어 사회봉사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는 의료인이자 교육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단순한 직업적 의무로 여기지 않고, 하나님께 받은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으며,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 사업, 지역 사회를 위한 기부 활동 등을 지속적으로 실천하였다. 또한, 의료 봉사를 통해 소외된 이웃들을 돕고 사랑을 실천했는데, 이는 그의 신앙적 가치를 반영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는 단순한 기부를 넘어, 사회적 변화를 위한 연구와 실천에도 힘썼다. 특히, 그의 생애를 살피다 보면 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도시 ‘대구’에 대한 깊은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전 장로는 “대구는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도시로 청라언덕과 같은 역사적 장소가 남아 있는데, 대구 근대사 연구를 통해 한국 기독교 역사 속에서 대구의 역할을 재조명하고, 이를 통해 기독교 신앙과 지역 발전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를 연구했다”며, “제가 쓴 ‘대구는 제2예루살렘’이라는 책 등을 읽어보면 대구 지역의 신앙적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유산을 보존하고자 그는 UNESCO에 대구 근대역사 문화유산을 등재하려는 활동 등을 펼치고, 근대의학, 교육, 기독교 전파의 중심지인 청라언덕을 중심으로 한 ‘청라정신’을 강조하며 그의 삶을 통해 그 철학을 전파하고 있다.

문준경 전도사 기도바위에서 기도하는 전재규 장로.
가정생활과 자녀교육
전재규 장로는 약사로서 인근 주민들의 건강과 보건의생을 책임진 강일혜 권사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모두 미국 아이비리그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전재규 장로와 강일혜 권사의 가정 내 조기교육 덕분인데, 그는 자녀들이 한국어와 영어를 모두 사용하되 부모와는 한국어로, 삼남매끼리는 영어로 소통하도록 독려했다. 덕분에 각 전공분야에서 언어로 인한 어려움을 겪지 않고 있다. 명절 때면 형제들과 가족들이 모여 가정 예배를 드리고 전재규 장로가 설교를 맡는다. 미국에 있는 자녀들과는 영상통화로 성경공부를 하고 있으며, 자녀들도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전재규 장로에게 기도를 부탁한다. 믿음의 유산을 자녀들뿐 아니라 그 다음세대에도 물려주려 오늘도 노력하는 전재규 장로이다.

전재규 장로의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을 가족들이 있는 식탁에서. 상단 서예 작품은 ‘하늘의 마음과 신의 손으로 고통을 빼고 기쁨을 준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전재규 장로와 대구선교
백암 전재규 장로가 걸어온 여정을 살펴보면 유독 대구와 관련된 내용들이 많다. 그가 대구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냈고, 대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2004년 동산의료원 박물관장으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역사 계승에 뜻을 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 전재규 장로는 대구의 신앙 지도자들이 강력한 성령체험을 받아 어두운 세상을 밝혀주는 선지동산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기를 소망하며, 대구 기독교 역사문화의 재조명과 성역화에 아낌없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의 저서 『대구는 제2의 예루살렘』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대구 교회를 기반으로 퍼져나간 선한 영향력과 복음 전도사역, 기도운동, 부흥회 전개 등에 대해 다루고, 대구 경북 지역 선교사들의 사역과 활동을 알리며 근대 역사문화 유산들이 문화재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
2024년 2월부터 한국순례길 이사장을 맡아 취임사를 통해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그리스 튀르키예의 사도 바울 순례길처럼 대한민국에도 자랑스러운 순례길이 존재한다”며, “앞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해 있는 각 지역의 기독교 순례길을 역사 위에 등장시키고 시민들에게 조명함으로, ‘청라정신’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정신이 우리 조국을 어떻게 이끌어왔는지를 보여주도록 힘쓰겠다”고 각오를 밝히기도 했다.

청라언덕에 건립된 여호와 이레의 동산 비석과 함께. 비문은 전재규 장로가 직접 지었다.
건강 관리 비결은 꾸준한 운동
전재규 장로는 “어릴 적부터 학교 운동장 철봉을 오르내리며 운동을 시작했고 기구체조, 기계체조뿐 아니라 태권도(당시 당수도)도 배우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운동을 지속해왔다. 이는 저도 모르는 사이 유약한 성격을 단련하는 계기가 되었고, 육체의 단련은 신앙과도 결부되어 삶에 큰 자신감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팔순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도 매일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는 전 장로는 운동기구로 가득한 방문을 열고 직접 시범을 보였다.
전재규 장로의 삶을 조명한 평전
최근 출간된 평전 ‘향기 짙은 인생 여정’은 전 장로의 생애와 신앙을 상세히 기록하며, 그의 내면과 신앙의 발자취를 조명하고 있다. 이 책은 전재규 장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영혼의 단짝이자 예장합동 증경부총회장 류재양 장로가 집필한 책으로, 저자 류재양 장로는 서문에서 “한 사람의 지나온 삶이 가치 있는 역사의 글로 남겨진다는 것은 그 삶의 여정에 남다른 헌신과 봉사와 희생과 결단이 있었다는 것이다. 백암만이 가진 그 영성과 아름다운 정신 사상을 기록하는 일은 참으로 가치 있는 일”이라며, ‘의학도, 신학도, 철학자, 주의 종’이라는 별명들로 전재규 장로를 논하고 있다. 또한, ‘백암 전재규 박사의 생애와 사상’에서는 그의 사상과 신앙의 뿌리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으며, 청라정신을 중심으로 한 그의 철학적 여정을 담고 있다.

전재규 장로와 아내 고 강일혜 권사.
나가며
전재규 장로는 의료인, 교육자, 장로로서의 삶을 통해 신앙과 삶이 일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삶은 단순히 개인적인 성공에 그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신앙적 본보기가 되었다. 그가 걸어온 길은 신앙과 섬김의 가치가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며, 앞으로도 그의 삶과 정신은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전 장로는 ‘천성을 향하여 전진하는 기독도의 삶’이라는 글에서 “모태신앙으로 시작해 평생 신앙인의 삶을 살아왔다. 어린시절부터…오로지 교회와 학교, 가정에만 충실한 외길 인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며, “여생에 내가 가진 전문성을 최대로 이용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역에 더 폭넓게 기여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앞으로의 기대를 전했다.
마지막으로 전국의 장로들에게 “장로라는 이름을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면서 하나님 은혜 안에서 중차대한 사명을 다해야 한다. 청라 정신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리며 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위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끼는 삶이 되시길 간절히 기원한다”고 권면했다.
/신희성 기자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은 자택 내 중앙을 장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