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성된 믿음] 중학교 시절 회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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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태생이 서울의 중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은 그 당시 흔치 않았다. 입학은 했으나 생활이 어려워 하숙을 못하고 고향에 아시는 분이 가족은 시골에 두고 서울에 올라와 지금의 혜화동에 있는 동성재단 포도원을 위탁 경영하시는 분이 계셨다.

나는 그 포도밭 농장 구석의 방 하나를 얻어서 자취생활을 했다. 가을철에는 포도밭에서 까치가 포도를 따 먹는 것을 막기 위해, 냄비를 소리 나게 때려 까치를 쫓는 일을 했다. 포도밭 뒷문으로 들어가면 처남댁이 있었는데 이곳에 들어가 화초재배 화단과 화분에 물주는 일을 했고, 겨울에는 할 일이 없어 한가했다.

그러나 나는 당시 어린 마음에도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고 마음먹고 신문 배달을 해볼까 해서 알아보니 민중신보(주간)에서 청소, 심부름 등 사환으로 할 수 있는 자리가 있었다. 낮에는 시간을 낼 수가 없어 새벽에 신문 배달을 하기로 하고 3개월 정도 해보니 아침 식사 문제 등의 어려움이 있어서 중단한 적이 있었다.

어느 때인지 매섭게 추운 겨울날이었다. 방 안에서도 물이 얼고 손발이 얼고 하는 추위 속에서 밥을 하는 일이 내게는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인쇄소에 다니시던 삼촌과 함께 생활했었으나 삼촌은 워낙 바쁘셔서 잠만 자고 나가시는 형편이라서 나 혼자서 식사를 해결하고 학교에 가야만 했다.

학교로 향하는 길은 내 인생의 꿈을 주는 발걸음이지만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고 언제나 시간에 쫓겨서 빠른 걸음이 나를 재촉했던 자취생활의 시절이었다. 부모님은 내 자취생활에 안타까움을 아시고 하숙할 수 있는 처소를 마련해 주셨다. 지금의 종로구 옥인동 인왕산 밑에 있는 이모님 댁이었다.

이모님 댁도 그렇게 넉넉하지 못해서 선뜻 부모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내가 먹을 식량을 드리기로 하고 하숙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는 시골에서 내가 먹을 쌀을 지고 서울 이모 댁까지 가는데 을지로6가 버스터미널에 오면 다시 그 쌀을 등에 지고 옥인동까지 걸어서 가야만 했다. 어깨와 허리가 쌀자루에 눌려서 힘들면 길가 담 밑 연탄재 버리는 콘크리트 박스에 걸쳐 놓고 쉬고 또 쉬기를 반복하며 이모 집까지 약 2시간이 걸렸다. 이모님은 쌀 가지고 오는 것을 보시고 반가워하시면서 “어! 우리 장한 조카 석산이 공부하기 힘들구먼. 그래 열심히 잘해서 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지” 하시면서 “농사짓기도 힘든 쌀을… 이렇게” 하시며 위로와 격려를 해주셨다. 나는 “이모님 웬걸요!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하면서 이모님께 감사했다.

최석산 장로

흑석성결교회, 수필가,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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