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여정] 운명처럼 이어진 사랑, 그리고 동반자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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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면 언제나 맨 앞쪽 서너 줄을 사이로 하고 아내와 함께 얼굴을 보던 시절은 그러니까 열여덟 살 무렵이었다. 교회의 크고 작은 행사 때면 아담한 면모의 하얀 얼굴로 늘 수줍은 듯 소녀적 면모로 아내는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둘은 결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서로를 의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아직도 앳된 소년이었지만 마음은 이미 청년의 기개를 갖고 있었던 나는 차츰 일요일이 기다려졌다.

사귀기 2년여를 조금 지나 나는 군대에 입영하게 되고 이후로는 수많은 연서로 서로의 그윽한 마음을 주고받았다. 알고 보니 아내는 당시만 하더라도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대대로 신앙생활을 해온 터로 내가 다니던 당시의 회남교회도 그의 어머니와 외삼촌이 설립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유한 집안의 막내로서 그의 오빠는 당시만 하더라도 벽촌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은 육군 중령으로 마을 사람들이 다들 우러러 보는 가문이었다.

어느덧 군 생활을 마치고 우리는 말없는 기쁨 속에 마치 머나먼 여행에서 돌아온 듯 그렇게 기쁘게 조우를 했다. 군 생활 중 수많은 편지로 서로의 마음을 읽고 미래를 다짐하면서 그리워했지만 막상 만나고 보니 이제 내가 진즉 할 일들이 남아 있었다.

우선 아내의 집안 어른들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는 일이었다. 아내에게 조언을 구하자 아내는 친정 아버님이 안계신 관계로 어머님의 승낙보다 오빠의 승낙을 우선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오빠는 육군 중령이라 매사에 절도와 기개가 있는 올곧은 성품으로 집안 어른들이 믿고 의지하고 신임하는 터라는 것이다. 

그리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내성을 지닌 무관 자체로 당시 마을에서도 높이 우러르는 분이라며 내심 아내도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나는 군 장교란 말에 처음에는 더럭 겁이 났지만, 이 또한 건너야할 강이라고 생각하고 부딪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을 고심하던 끝에 스물일곱 살도 저물어갈 가을 무렵 육군본부로 그의 오빠에게 결혼 승낙을 받으러 단신으로 올라갔다. 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혈기왕성한 용기와 의욕을 가졌는지 모를 일이었다.

남들이 이르기를 조용하고 유순한 성품이라고 나름대로 나를 평하지만 어떤 결정을 할 때나 적기의 시기라고 단안을 내리면 겁 없이 전력투구하는 나의 면모가 여실히 드러나는 때이기도 했다. 

용산의 육군본부에는 마침 만추의 계절이라 병영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분위기가 있었다. 오후 3시쯤이었을까 장교면회실에서 어렵게 만난 당시의 육군 중령인 아내의 오빠는 전형적인 무장답게 한 치의 빈틈없는 모습이었지만 서글서글하고 통큰 성품을 겸비한 분으로 마치 움직일 수 없는 태산 같았다. 그러나 눈만큼은 매서워서 근업하게 나를 지켜보며 내 안의 그 무엇을 발견이라도 하려는 듯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하지만 어렵게 만든 이 기회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있는 나는 예의를 갖춘 인사로 나를 간략하게 소개하고는 단도직입적으로 누이와의 결혼을 하고 싶으니 승낙해 달라고 간신히 운을 뗐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도 모르는 일각의 순간이 마치 한 시간이라도 족히 되는 듯싶었다.

한참동안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아내의 오빠는 결연한 의지로 말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나?” “언제까지나 책임질 수 있나.” 단 두 마디의 말씀을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엉겁결에 “예” 하고는 감읍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 어렵게 궁리하고 생각하던 결혼 승낙을 전형적인 무장답게 단호한 두 마디의 말씀으로 승낙을 얻은 것이다. 

이후 우리는 그해 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 대전의 한 예식장에서 하나님에 대한 맹세로 둘이 하나가 되는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때 내 나이 27살, 아내는 24살의 꽃 같은 나이였다. 그리고 결혼식을 마치고 바로 신혼여행지인 부산으로 향했다.

해운대 신혼여행지에서 바다를 처음 본 나의 신부는 너무나 감격스러워 했다. 그것도 바다가 없는 내륙지방의 오지에서 늘 상상 속에서만 그리워하던 바다를 처음 보며 감탄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달맞이 고갯길에서 해월정을 보고 내려오며 보던 그 에메랄드빛의 푸른 바다는 그날따라 먼 풍경속의 수평선에 커다란 기선과 돛선이 꿈속처럼 떠있고, 바다 가운데로 무리져 나는 갈매기떼들이 먼 데 동백섬과 어울려 한편의 영상의 필름을 보듯 눈부신 비경 그 자체였다.

그 풍경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아내가 가벼운 탄성과 함께 “아, 이런 아름다운 곳이 다 있네”하고 감격스러워 했다. 그 표정을 바라다보며, “그럼 이곳에 살면 되지”하고 문득 나는 한마디 하고 말았다. 그 말이 현실이 되어 운명처럼 지금도 이곳 해운대 달맞이길의 아파트에 살게 될 줄이야. 그때는 짐작이나 했으랴. 부산에서 처음의 시작인 전셋집에서 신혼살림을 차리고 새색시는 시어머니와 함께 살며 당시만 하더라도 넉넉지 못한 살림살이에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직도 사업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단지 결혼해 어른이 된 내가 하는 영세 규모의 가내 공업 시절에도, 정계에 입문할 때도, 늦깎이 대학시절도, 기업가로서의 힘든 시절에도 이렇다 하는 말 한마디 없이 오직 나만을 믿고 신뢰하며 지켜보는 그 모습을 지금도 견지하고 있다.

온갖 시련과 고통을 마음으로 삭이며 표식하지 않는 본성의 마음으로 오직 묵묵한 내조로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아내를 볼 때마다, 늘 감사하다는 말밖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알게 모르게 오늘의 나를 있게 하고 나를 편안하게 해준 아내의 내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길을 걷고 있을 것인가, 그리고 나의 생애는 어디쯤 와있을까.

양한석 장로

• 문현중앙교회

• 시인 

•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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