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익두 목사의 부흥회 ‘신유의 기적’
신사참배·북한 총선거에서의 논란
때로 그것은 죄 용서의 은사에 대한 끝없는 감격이요, 때로는 임박한 심판 앞에서 전율하며 속죄를 갈망하는 두려움과 불안의 외침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모름지기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의 보혈에 대한 찬송과 감동이었다.
그의 설교 내용은 예수의 십자가와 보혈, 그리고 회개였다. 그 큰 입으로 익살과 유머를 곁들여 흉내내면서 설교할 때면 교인들이 완전히 매료되었다. 집회에서 상투쟁이 상투를 자르게 하고, 일전짜리 연보를 연보함에 넣으면 그는 내려가 그 큰 두 손으로 움켜 교인들 면상에 와락 뿌리며, “이따위를 하나님 앞에 바쳐!” 하고 노려봤다.
겨레는 그날 마음의 위로와 힘에 압도되어 거듭되는 감격에 목 놓아 울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찬송하는 소리, 한편에서는 회개하는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더구나 간증 때 감격의 강도가 압도했다. 생전 걷지 못하던 11세 된 앉은뱅이가 신유의 기적으로 서서 걷게 되자 사람들은 “어린 듯 미친 듯 박장하는 소리, 집이 떠나가듯 했고, 평양 연합집회 때에는 미친 듯 취한 듯 흥분된 신경을 걷잡지 못했다”라는 증언이 있다.
다음은, 기도 치병의 이적이었다. 그 신유(神癒)의 대상은 대개 빈한한 층이었고, 심지어 거지들도 있었다. 이 신유의 능력은 다만 기도의 정성 때문이었다. 서울 승동교회 성회 때에는 10일간 계속 금식기도 상태에서 부흥사경회를 진행했다.
치병 방법은 다양한데, 대개 그의 활동 시기에 따라 바뀐다. 우선 초기에는 개별 안수기도였다. 이적은 그때 곧 기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한 주일, 혹은 몇 달의 시간이 걸려 나타나기도 했다. 기도도 한 번 할 때가 있고, 어떤 때는 특정인을 위해서 장시간, 그리고 심지어 4, 5차례 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기도 받은 사람이 다 치병된 것도 아니었다.
다음 단계에서는 환자들이 너무 많이 몰리기 때문에 부흥회가 끝날 무렵 시간을 따로 정해서 같은 병종의 단위로 따로 앉혀서 기도했다. 그러나 서울 집회 때부터는 병자 쪽에서 신앙심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김익두 목사를 바라보기만 해도 거리와 관계없이 쾌유되는 일이 나타났다. 부흥 집회 기간 중 사흘 가량 금식기도하고 치병만 하는 데에도 수백, 수천의 환자들을 치료할 방법이 없었던 불가피한 조건이 이런 기도 치병 형식으로 가게 한 것이 확실했다.
함석규 목사의 아들 함덕용 군은 용천에서 병중이었는데 함태영 목사가 권유해 데리고 와서 서울 윤치소 장로 집에서 김익두 목사의 기도로 쾌차하게 된 일이 있었다.
이런 김익두 목사에게는 두 가지 실수가 있었다.
먼저는, 신사참배 문제였다. 1940년 신의주 제일교회 부흥회에 갔다가 일경에 붙들려 교인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한 사실이었다. 이것은 교인들의 안전을 위해서 취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신사참배를 반대했다. 그래서 일본 제정 말기에는 함구령을 내렸고, 황해도 운율군에 한 과수원에서 거주제한을 받았다. 신사참배에 참여한 문제로 해방 후 채정민 목사에게 꾸지람을 들은 일이 있었다.
다음은, 해방 후 북한 공산당 북괴 정부 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6년 11월 3일 주일에 실시하기로 했다. 그런데 교회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다. 5도 연합 노회의 태도는 확고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그 노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채택하고 당국에 통고했다.
“북한의 2천 교회와 30만 기독교 신도들은 신앙의 수호와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다음 5개 조항의 교회행정의 원칙과 신앙생활의 규범을 택정 실시하고 있으므로 귀 위원회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라 마지않는 바입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