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여시각장애원에 들어섰다.
“와아! 전도사님 사모님이 함께 오셨네요.”
고아들은 나와 신부가 온 것을 알고 달려와 주렁주렁 매달렸다.
“그래 잘 있었니? 요 예쁜 것들.”
우리는 그들과 어울려 함께 뒹굴었다. 저녁에는 고아들이 먹는 식탁에서 함께 된장국에 보리밥을 말아먹었다. 원장님이 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신혼 부부가 이거 뭐하는 짓이야.”
그 말을 새색시가 받았다.
“임마누엘 보리밥은 특별 메뉴로 주문해 지었나 봐요. 하와이 보리인가요? 알래스카 보리인가요?”
“아, 그것 코리아 무주구천동 산이라오.”
능청맞은 원장의 대답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때 나의 눈물방울이 흘러 국그릇 속으로 떨어졌다.
“여기 된장국으로도 모자라 눈물에 밥 말아먹는 신랑도 있네. 경사났네. 경사났어.”
그때였다. 임마누엘 성가대가 폭죽을 터뜨리며 축송을 했다. 그 축송 속에는 아이들의 환호가 어우러졌다. 원장님의 배려였다.
4만 원짜리 단칸방에 차린 신혼 살림
경제력 없는 나는 가정을 이룬 뒤에도 더욱 더 험한 가시밭길을 걸어야만 했다. 당시 전세 4만 원짜리 단칸방을 얻고 수유리 시장에 나가서 주방가구를 들여놓았다. 그때는 졸업 논문 준비로 바빴던 때라 한 달 동안 신부를 집에 혼자 남겨 두고 나는 기숙사에서 마지막 졸업 논문을 손질해 제출했다.
신부 혼자서 낮에는 임마누엘 여시각장애원에 가서 일하고 밤에는 독수공방 홀로 있게 되자 장인, 장모님이 오셔서 함께 지냈다. 화재 사건 이후로 당장 장사하는 일도 쉬는 터라 어쩔 수 없었다. 우리들은 조금도 불평 없이 함께 지냈는데, 저녁이 되면 나는 그곳에 있는 남자 선생 기숙사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우리의 삶은 한마디로 엉망진창이 된 셈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장인, 장모님은 나를 여러 번 원망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앞으로 전개될 좋은 날을 바라보고 당분간 참고 살자고 말씀 드릴 수밖에 없었다.
1969년 2월, 제62회 장로회신학대학 졸업식이 영락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식장에는 전국에서 모여 온 축하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나는 지난 3년 동안 고생한 보람으로 신학석사 정규 과정을 통과해 시각장애인 선교 사역에 이바지할 수 있게 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렸다.
수유리에 있는 여시각장애원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새로운 일터를 주셨다. 그 교회는 분규가 있던 교회로서 빚도 많았던 것 같다. 담임목사가 나를 찾아와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이를 수락하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나마 정성껏 교회를 보살폈다. 그 무렵 미국으로 유학 간 강형길 동기생의 어머님이 작고하셨으나 귀국하지 못했다. 빈소는 정릉과 미아리 꼭대기에 있는 집에 마련되었다. 나는 아내와 학생들을 대동해 문상을 갔다. 철야하면서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나의 아내는 조가를 불러 유가족들을 위로했다.
나는 틈틈이 영어 가정교사 노릇도 하고 미국에 유학 가기 위해 어학 공부하는 간호사들의 영어 회화 공부도 도와주면서 생활비를 벌어 썼다. 아내는 구로동에 있는 가발 공장의 사감으로 몇 개월 동안 일하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일년 반 동안 정상인 교회에 나가서 봉사하면서 목회와 무관한 몇 가지 중요한 일을 체험하게 되었다. 개척 교회는 담임 목사의 전적인 권위 밑에서 일해야 하므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고, 또한 미래가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