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봄날이다. 투명한 광채 따뜻한 햇볕이 온 대지를 더듬고 지나갈 때면 이 산 저 산 언덕에서 아른거리는 물빛 정경이 파릇한 풀빛 생명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봄날을 나는 평생 보고 또 보아온 터이지만 매회마다 느끼는 감회는 제각기 다르니, 봄날이야말로 창조주가 우리에게 선물로 준 극치의 예술이 아닌가 싶다. 이럴 때면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자연의 이치와 인생의 의미를 더듬어 본다.
내 어릴 때 봄날은 한해의 새 출발신호로 느껴졌다. 꽁꽁 얼었던 대지에 새싹이 돋아난 자연의 모습은 새 생명의 출발이라 여겨지기에 그렇게 보았다. 청년시절에는 청춘의 상징인 약동의 절기로 느껴졌다. 생기 있는 활력이 자연의 이 법에 따라 이루어진 현상이 봄철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날이 가속화되는 수액의 열정이 강한 생명이 되어 잎으로 피어오르듯 나의 가슴에 감추어진 내면의 생명력이 갈수록 표면화되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이것이 사랑의 촉진제가 되어 청순한 신부의 면사포를 벗기는 일들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따뜻한 봄날은 마치 인생의 열정을 꽃피게 하는 그러한 시기라서인지 무서울 것 없이 추진력 있게 성취하려는 의욕이 차고 넘치는 나날이기도 했다. 이 모두 봄이 아니고서는 어디서 그런 감동이 피어오를 수 있겠는가. 어쩌면 이 시절처럼 빛나는 나의 의욕은 없었을 것이다.
30대에서 40대에 이르러서는 이른 봄을 마치 기다림의 상징으로 보았다. 춘분이 지난 3월이 되면 그간 메말랐던 가지마다 수액을 나르느라 수피가 터질 듯 부풀어 있음을 본다. 그런데도 아직 새잎이 피어나지 않고 있듯이 나의 뚜렷한 목표를 세우기엔 시간이 더 필요해서인지 기다림이 필요했다. “기다리는 자세는 보다 나은 내일의 알찬 인생의 꽃이 반드시 아름답게 피어나기 위함”이라고 릴케는 말했다. 이 말을 따지고 보면 자연의 원리에서 인생의 이치를 배워온 것이다. 인생의 꽃은 아름다운 삶을 일컫는 것이다.
50대와 60대 봄날의 정경을 한마디로 말하면 그간 쌓아올린 온갖 정열의 대가로 이루어진 환희의 봄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겨우내 회색 장막으로 뒤덮였던 대지, 굳고 단단했던 지각, 지금도 조석의 찬 서리가 가시지 아니할지라도 땅속에선 여전히 새순이 돋아나도록 식물에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인생의 깊이와 가치를 계속 이루기 위해 환희의 삶이 이루어지도록 힘써 달라는 봄날의 의미라 여겨진다.
80대 이후 노령(老齡)의 봄날은 어떠한가. 모든 생물들은 휴면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용이한 방법을 찾아 추위를 모면하고 있다. 그러나 식물의 뿌리는 땅속에서 조금도 쉬지 아니한 채 뿌리에서 뿌리로, 심지어 나무줄기의 심근까지 자양분을 공급해 주고 있다. 그래야만 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새싹이 피어나 아름다움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인생도 이처럼 후대의 삶을 마련해주어야 번영의 삶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지금 눈앞에는 나무마다 봄 신령이 기어오르고 있다. 얼마나 신비로운 자연의 경관인가. 나는 이런 전경을 보면서 흐트러진 나의 마음, 구겨진 나의 심리를 곧고 바르게 펴 정돈하고 있다. 봄날의 유혹이 나를 일깨워 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조용히 눈을 감고 자연의 원리를 깊이 되새겨 보는 이 시간이다.
하재준 장로
중동교회 은퇴
수필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