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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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 선교사와 배유지 선교사의 광주 사역 역사

윌슨 선교사 부부는 남이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감당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그 수많은 나환자들을 돌봤으며, 여천 애양원에 모여든 환자들을 돌보느라고 밤잠을 자지 못했던 일도 많았다. 더욱이 윌슨 선교사는 신학교를 졸업한 의사였기에 나환자촌에 있는 수많은 어린이들의 영혼을 위해서도 큰일을 했다. 1918년 3월에 <신학세계> 잡지에는 이런 글이 소개됐다.

“우리 병원의 나환자 26인은 주일학교를 29개 반으로 조직하고 그 반에서는 주일 뿐만 아니라 매일 모여서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그때 교육을 받은 주일학교 학생들이 그가 떠난 1940년 이후부터는 모두들 윌슨 선교사의 사역을 감당했다. 윌슨 선교사 부부는 1940년 강제 출국을 당했다가 1946년 잠시 내한했으나 1948년 정년이 되어 고향으로 영원히 귀국했다.

그와 절친했던 최흥종 목사는 해방이 되자 전남도지사 최영욱 박사 자문의 일도 도왔고, 호남일보 사장도 역임했다. 정치계의 유혹도 많았지만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그가 기도했던 나환자 이상촌을 만들기 위해서 1957년 전남 나주군 산포면 신도리에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 애양원, 소록도, 음성 나환자들을 모이게 했다. 그곳에 교회를 설립하고 자립 자족하는 생활터전 속에서 나환자 천국을 만드는 데 성공하고 나환자들과 함께 생을 보냈다.

광주 숭일학교와 선교사들

배유지 선교사와 광주 숭일학교

광주 지방 최초로 근대문화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배유지 선교사가 설립한 두 남녀 미션학교에 의해서였다. 1906년 배유지 선교사 사랑채에서는 배워야 산다는 신념을 갖고 있는 어린 남녀 청소년 4명(남자 1명, 여자 3명)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때 배유지 선교사는 학생들을 따로 분리해서 교육시켜야 한다면서 1907년 남녀를 따로따로 교육시켰다. 남학생은 계속 배유지 선교사의 사랑채에 머물면서 교육을 받았으며, 여학생들은 프레스턴(J. F. Preston, 1875~1975, 한국명:변요한, 이하 변요한으로 표기) 선교사의 사랑채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1908년 교육의 중요성을 느낀 배유지 선교사는 자국 선교부의 협력을 얻어 양림동에 최초로 고층 건물을 신축했다.

“1908년 숭일고등 소학교로 인가가 나자, 설립자 배유지 선교사는 1909년 광주시 양림동 66번지에 종각이 있는 3층(지하실 포함)으로 된 학교 건물을 착공해 이듬해 1910년 여름에 완공했다. 그리고 그때까지 배유지 선교사의 사랑방에서 가르치던 학생들을 새 건물로 옮겨 서구식 학교의 면모를 갖추고 성경, 영어, 산술, 법제, 역사 등을 가르쳤다.”(1973. 2. 2. 전남일보)

1908년 고종 황제로부터 숭일(崇一)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인가를 받고 90년 가까이 그 이름을 사용해 왔다. 그 이름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학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건물이 완공되자 광주에서는 최초의 건물이 되기도 했으며, 건물의 완공 후 변요한 선교사가 초대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학교는 계속 발전했다. 더욱이 광주 인근에 있는 많은 교인들은 새로 건축된 웅장한 건물과 학교를 구경하기 위해서 도시락을 싸가지고 와서 하루종일 학생들의 공부하는 모습과 운동장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돌아가기도 했다.

이렇게 건물이 세워진 지 얼마 안 되어 숭일학교 옆에 자리잡고 있었던 수피아여학교도 새로 신축된 숭일학교 강당에 모여 성탄절을 전후해서 두 학교 학생들이 합창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연극 발표도 했다. 얼마 후 학교 바로 옆에 오원 선교사의 희생적인 삶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오원기념각이 신축됐다.

광주 숭일학교는 전남 내륙지방의 교육의 요람지가 됐으며, 많은 교회 청소년들이 광주 숭일학교로 몰려오면서 민족의식을 철저히 교육시켰다. 이때에 남대리 선교사와 대학 동창이었던 이승만 박사가 숭일학교에 방문해 ‘민족의 나아갈 길’이란 제목으로 강연회를 가졌으며, 이 일로 학생들은 더 깊은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또한 학교 당국에서는 유능한 교사의 확보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목포 영흥학교 교사로 있던 남궁혁이 배유지 선교사의 청빙으로 숭일학교로 오게 돼 많은 학생들이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갖게 됐다.

1911년 조선총독부의 교육령에 의해 보통과 4년제, 고등과 2년제로 학제를 개편하고 수업을 진행하던 중 1911년 6월 제1회 보통과 졸업생 14명을 배출하게 됐다. 졸업생으로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시 초대 외무부장관을 역임한 조정환을 비롯해서 최영욱, 강대모, 신동호, 채상연, 신도일, 이기헌, 나천득, 배순홍, 정명섭 등이었다. 이중 최영욱은 최흥종 목사의 동생으로서 해방 후 미군정 시절 전남 도지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보통과를 졸업한 14명의 졸업생들은 고등과(현재 중학교 과정)에 진학했으며, 1914년에는 2년제 특별과(전문대학 과정)에 진학했다.

그 동안 교장으로 수고했던 배유지 선교사, 변요한 선교사, 녹스(Rev. R. Knox, 한국명:노라복, 이하 노라복으로 표기) 선교사 등이 시무하면서 학교의 기초를 튼튼히 다졌다. 1915년 제3대 교장으로 취임한 타마자 선교사는 숭일학교 학생들을 보다 튼튼하게 키우기 위해 미국 모교회와 모교에 연락해 야구공, 야구배트, 글러브 등 운동기구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운동기구가 광주에 도착하자 야구단을 조직하고 전 숭일인에게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 일로 광주에 있는 일본인, 한국인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숭일학교 운동장에 모여들어 이들의 운동을 지켜봤다.

타마자 선교사가 숭일 학생들에게 야구를 소개함으로써 전교생들이 팀을 만들어 야구를 하게 됐으며, 이 운동은 곧 일본인 학교로 번져 야구에 대한 광주의 인기는 대단했다.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1916년 3월에는 특별과 1회, 고등과 4회, 보통과 4회 졸업식이 거행됐으며, 졸업식사에서 타마자 선교사는 야구인처럼 튼튼한 삶을 살라고 몇 번이고 부탁했다.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는 해가 갈수록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면서 체력 단련은 물론 민족운동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학업에도 열심히 임했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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