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J Edwards, 1703~1758)는 미국 코네티컷주(Connecticut, 미국에서 세 번째로 작은 주)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네 명의 누이, 여섯 명의 여동생 사이에서 외아들이었다. 가족들에게서 받은 사랑은 평생 ‘하나님의 사람’의 바탕이 되었다. 14살에 예일 대학 입학해 최우수 성적으로 졸업한 천재(天才)였다. 후일에 천재적인 지적 능력과 탁월한 영성의 자질을 가지고 미국 교회의 대각성 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설교를 듣고 5만 명 이상 회개했다. 아내와 함께 매일 1시간 이상 기도, 목회를 할 때는 12시간 이상 성경 연구를 실천했다.
첫 목회는 19살에 뉴욕 장로 교회에서 시작했다. 다음 해에는 예일 대학 교수가 되었다. 2년 후 교수직을 사임하고 목사로서의 길을 시작했다. 20세기 설교의 대가(大家) 영국의 로이드 존스(L R Jones,1899~1981) 목사는 “루터와 칼빈이 히말라야 산맥이라면 에드워즈는 에베레스트 산봉우리와 같다.”고 말한 바 있다. 벤자민 워필드(B Warfield,1851~1921,미국의 칼빈주의 신학자)는 “성자요 철학자요 부흥사요, 미국 지성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신학자, 가장 현명하고, 가장 겸손하며 가장 거룩한 사람이었다.”고 했다.
에드워즈의 삶은 완벽한 순종을 위한 몸부림, 거룩을 향한 열망,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고자 하는 뜨거운 열정, 탁월한 지성과 영성으로 미국의 영적 각성 운동과 부흥 운동을 이끌었다. 그러나 20여 년 동안 목회했던 노스햄톤(Northampton) 교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교회에서 청년들의 성범죄 사건이 발생했는데 교회 지도급 인사들의 자녀가 관련되어 있었다. 에드워즈는 엄격하게 치리(治理)하고자 했으나 벽에 부딪쳤다. 에드워즈는 한없는 인간적 비애(悲哀)를 느꼈다. 자신을 시기(猜忌)한 주변 목사들의 비난도 있었다. 사랑하는 자녀를 먼저 떠나 보내는 슬픔을 겪기도 했다.
목사직을 쉬는 동안 주옥(珠玉)같은 명저(名著)들을 집필했다. 하나님의 섭리가 계심이었다. <신앙 감정론> <구속사> <원죄론> <부흥론> 등이었다. 현재 예일 대학 출판부에서 순차적으로 그의 저서들을 출판하고 있다.
에드워즈가 평생 추구했던 것은 깊은 영성(靈性)이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 성령과의 교통이었다. 에드워즈는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과 달콤함을 체험했다. 영성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영적인 만남으로써 시작되었다. 은밀하게 나누고 교통하는 영성이다. 그가 체험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가 영성의 근원이었다.
한적한 곳에 기도처를 만들었다. 한 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회심의 순간에 경험했던 성령의 빛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감격은 평생 그의 가슴을 뜨겁게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 살았다. 말씀의 영광 앞에서 에드워즈는 떨었다. 매 순간을 하나님의 임재 의식 가운데 있었다.
에드워즈가 회심을 하게 된 동기(動機)는 대학 생활 때 얻은 늑막염(肋膜炎) 때문이었다. “죽음에 가까운 지경으로 끌고 가셔서 지옥의 구덩이로 떨어 뜨리셨다”고 회상했다. 그 후부터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단념하고 영혼을 간절히 느끼며 구원을 얻으려고 몸부림쳤다.
회심 후 새로운 성향(性向)으로의 변화는 하나님의 일들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 것이었다. 영적인 달콤한 기쁨을 느꼈다. 많이 읽고 묵상했다. 하나님의 감미롭고 부드러운 거룩한 권세를 느꼈다. 존엄하신 온유함, 경건한 아름다움, 높고 위대하고 거룩한 온유하심을 느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지 않으면 죄를 인식할 수가 없다. 죄는 전(全)인격을 공격한다. 청년 시절에 70여 개의 결심문을 썼는데 평생을 두고 실천을 위해 힘썼다. 에드워즈는 일생 동안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았던 칼빈주의자였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