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9월 지인 모임에서 제주 여행을 계획하면서 한라산 정상에 올라가 보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만 해도 그렇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출발일이 다가오면서, 평소에 등산을 즐겨하지는 않던 터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루 한두 시간쯤 걷거나 등산하는 건 큰 문제가 없지만 과연 하루 종일 본격적으로 등산하는 건 무리가 아닐까? 가끔 허리통증이 있는데 하필 그날 당일에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어떻게 하나? 동행에게 폐나 끼치지 않을까? 하는 온갖 걱정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 한라산 산행 제안을 듣는 순간, 정확히 52년 전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한라산에 올랐던 기억이 떠올라 스무 살 풋풋한 젊은 시절로 잠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무리한 일정에 거의 무전여행처럼 다니면서 몸을 혹사해도 한라산 정상에 오르는데 거뜬했던 젊은 날의 추억이 새로웠다. 그 이후 제주도에는 출장이나 가벼운 여행으로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한라산에 오를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 나이 70이 지나서 난데없이 한라산 산행이라니! 뜬금없는 제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 새로운 도전에 일행 모두가 작은 흥분으로 들뜬 모습이 보기 좋았다.
드디어 대망의 출발 날인 3월 12일, 다행히 좋은 컨디션으로 제주에 도착해 숙소에서 기분 좋은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새벽 5시 20분, 아직 캄캄한 어둠 속에 찬바람을 맞으며 성판악 주차장으로 출발했다. 6시쯤 주차장에 도착하니 텅 빈 주차장에 인적도 드물고 캄캄한 적막이 감돌았다. 준비해 온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설렘 반 걱정 반으로 동틀 때를 기다렸다. 어둠이 가시고 시야가 어렴풋이나마 트이기 시작할 즈음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니 벌써 등산객들이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때가 6시 50분쯤이었던 것 같다.
미리 받아둔 예약증명서와 신분증을 확인한 후에 입구를 통과해 기다리던 한라산 등반을 시작했다. 어스름 속에 서있는 나무에 커다란 나뭇잎들이 코끼리 귀처럼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약간 기이해 보였다고나 할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군락을 이루며 자라는 굴거리나무라고 한다. 완만한 경사길이 편안한데, 약 30분쯤 올라가니 눈이 쌓여 있고 길은 4, 50cm의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어서 여기서부터는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게다가 길옆은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이라 오르는 내내 조심해야 하는 힘든 길이었다. 힘겹게 올라가기를 3시간, 드디어 진달래밭 대피소에 도착하니, 2.3km만 더 가면 백록담이지만 아쉽게도 아직 눈 때문에 등산로가 닫혀있어서 여기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보통 하산길은 더 쉬운데 이곳은 얼음 덮인 길이라 내려올 때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지만, 마지막에는 눈도 없고 평탄한 길이라 가볍게 내려올 수가 있었다. 드디어 입구에 도착하니 오후 1시경, 정상까지 가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래도 해냈다는 성취감으로 가득했다. 산행 전의 걱정이나 두려움이 싹 가시는 상쾌한 기분이었다.
산행 다음 날 방문한 어느 박물관에 걸려있는 글귀가 내 성취감을 확인해 주는 듯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어떤 마음가짐을 뜻한다. 청춘이란…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 두려움 없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그렇다! 냉소와 비관을 벗어나 낙천적인 마음을 갖는 한, 우리는 “여든 살에도 청춘의 이름으로 죽을 수 있는 희망이 있다”고 하겠다.
김완진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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