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이모님께서 심부름을 시키셨다. 지금의 종로 5가쯤에 있는 친척집에 같이 가서 올 때는 나더러 자전거에 놋그릇(제기세트)을 싣고 집에 가져다 놓으라는 것이었다. 나는 감히 거절할 수 없어 자전거 뒷자리에 놋그릇을 싣고 가는 도중이었다.
어느 할머니가 횡단보도가 아닌 곳에서 길을 건너고 계셨다. 그 할머니와 충돌해 놋그릇이 길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쨍쨍하면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차도에 떨어졌다. 나는 자전거에서 내려 할머니에게 다가가 다친 곳은 없는지 살피면서 당황하고 있을 때 할머니께서는 일어나시면서 “이거 봐 학생이구먼. 조~ 조 조심해야지 쩌쩌…” 하시면서 “괜찮으니 어서 가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놀랐던지 긴 한숨을 내쉬며 할머니를 부축해 인도로 안내해 드렸다. 그리고 내동댕이쳐진 놋그릇을 주워 자전거에 다시 포개 싣고 옥인동 이모댁을 향해 달렸다. 놋그릇을 이모댁 마루에 내려놓고 ‘모든 면에 침착해야지’ 하면서 서울의 교통 환경을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당시 서울에는 지금과 같이 차가 많지는 않았지만 길 복판에는 전차가 다니고 차도에는 자전거도 제법 다니곤 했다. 길 가운데서 자전거로 할머니를 치었으나, 다친 곳 없어 이만한 것이 다행이었으며 이때만 해도 신앙은 없었지만, 신의 가호라 생각했다.
나의 학업 생활은 그렇게 평탄치만은 않았다. 처음에는 시골 출신이라 도시 생활에 익숙하지 못해서 친구들과 제대로 어울리지도 못했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시절 이모부께서 신병으로 회사에서 퇴직하게 되어 형편이 더욱 어렵게만 되었다.
누님이 성북동 정릉산 밑에 사셨는데 그곳에도 있을 형편은 안 되지만 며칠 있으면서 공부를 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내 마음이 편했고 좋았던 곳은 누님댁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남매라는 정 때문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나 생활에서는 옥인동 이모님댁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이모님댁에서 계속 하숙을 하면서 공부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모두가 자식 훌륭하게 키우려는 부모님의 큰 사랑이었고 나는 부모님 은혜를 생각하며 다시 한번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최석산 장로
흑석성결교회, 수필가,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