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청라(靑蘿)정신과 대구·경북 근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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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역과 희생의 가치 기억

| 대구·경북 근대문화의 초석

한국에 첫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 북장로회는 평양, 서울, 대구를 3대 선교거점으로 삼았다. 대구의 초기 장로교회 형성과정에서 초석을 놓은 선교사들은 윌리엄 베어드, 에드워드 아담스, 우드브리지 존슨, 헨리 브루언, 아치볼드 플레처, 하워드 마쳇이다. 이들이 가르치고 헌신한 교육과 의료 선교정책이 영남지방 선교와 교회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대구 근대문화의 초석이 되었다.
대구에 파송된 선교사들이 제일교회, 동산병원, 애락원을 설립했으며, 간호사 양성소, 대남학교, 계성학교, 신명학교 등은 그들의 땀과 헌신과 희생의 열매들이다. 이 역사적인 장소들을 발굴하고, 길이 보존해야 한다. 그들의 선교가 대구 근대화의 초석이 되었다. 그들은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설립했을 뿐만 아니라 경산에서는 전쟁고아 소녀들을 위한 ‘메노나이트 실업학교’를 세우고, 간호 개선과 의료물품 사용을 위한 교육, 전쟁 미망인을 위한 재봉소, 교육, 농촌생활 개선을 위한 농촌지도소, 아동복지 사업, 홍수 방지와 농사 급수를 위한 저수지와 제방 건설, 서양의 학문과 문화를 익히도록 현지 지도자 양성을 위한 선교에 헌신했다.
대구의 근대문화는 대구 기독교의 역사와 맞물려 있다. 미국의 선교사들이 대구에 입성해 서양의 문물을 전하기 전까지 대구뿐만 아니라 한민족은 일본의 통치와 박해와 감시와 수탈로 처참한 가난과 질병과 열악한 환경에서 목숨을 부지하려고 초근목피(草根木皮)의 생활을 이어갔던 시대였다. 이 암울했던 시기에 미국의 선교사들은 세계를 보는 역사와 학문, 발전된 의료기술, 개화된 문화, 강한 경제력, 높은 삶의 질을 선보이며 대구 근대사의 선구자적 활동을 시작했다. 대구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학교를 세워 길거리에 내몰린 아이들을 교육하기 시작했고, 병원을 세워 나병과 온갖 질병에 죽어가는 환자들을 치료했으며, 교회를 세워 인류 역사와 그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는 복음을 전했고, 부인들과 자녀들을 교육했으며, 경제력을 높일 수 있는 상업, 공업, 농촌개량 사업 등을 통해 근대사의 초석을 놓았다.

대구동산병원(1906년)

| 복음을 통한 선교사역

대구선교지부가 개설된 후 선교사들은 대구 경북지역을 나눠서 자신들이 맡은 지역에서 교회 개척과 협력에 최선을 다했다. 선교사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교회 개척을 통한 선교였다. 1899년 공식적인 대구 선교지부가 개설된 후 대구를 중심으로 경북지방 선교에 참여한 선교사들은 브루언 목사, 아담스 목사, 맹의와 목사였다. 이 선교사들은 자기가 맡은 지역을 순회하면서 복음 전도사역을 이어갔다. 당시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은 ‘네비우스 방법’이었다. 이 정책은 중국에서 30여 년간 선교했던 네비우스가 서울을 방문해 전달한 선교정책이었다.
그 선교정책의 기본 이념이 ‘자진전도, 자력운영, 자주치리’라는 3대 명제로 정리되어 한국 개신교회가 대표적인 선교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이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가 채택한 선교 방법이었다. 이처럼 자율성을 강조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베어드, 아담스, 브루언 선교사는 그 지역인이 신자가 되었을 때 그 본래의 직업이나 환경을 그대로 고수하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특별히 대구에서 존슨 선교사가 1899년 10월 1일(실제 1899년 12월 25일) 에한옥 한 채를 구입해 서양 약방의 간판을 걸고 개원한 것이 대구 ‘제중원’의 시작이었으며, 나중에 동산기독병원으로 개칭되었다가 오늘의 동산의료원이 된 것이다. 존슨이 사임한 후에 플레처가 2대 원장으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면서 그 병원이 기독교적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목적을 두고 병원 내에 ‘병원전도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플레처는 1921년 2월에 동산기독병원 직원들을 중심으로 전도회를 조직해 산간벽지를 순회하며 의료봉사와 함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동산기독병원은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을 시달했다. ‘첫째, 모든 환자에게 복음을 전할 것, 둘째, 가능한 한 많은 환자가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것, 셋째, 개종한 자들은 교회와 꼭 연결을 맺어줄 것’ 등이었다. 동산기독병원 전도회는 1921년부터 1941년까지 대구·경북 지역에 총 112개의 교회를 설립했다. 전도회 회원은 급여의 1%를 전도와 봉사를 위한 기금으로 내어놓았고, 산간벽지를 순회하며 무료 의료봉사를 했고, 만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다. 그 사역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경북 서북부 지역의 복음 전도와 교회 개척에 획기적으로 공헌한 선교사는 브루언 선교사이다. 그는 김천을 중심으로 전도 구역을 김천구역, 지례구역, 성주구역, 고령구역, 달성구역으로 세분화하고 순회하면서 교회가 없는 곳에는 전도집회를 통해 교회를 설립하고, 이미 신자들이 있는 곳에는 교회설립을 도왔다.
불신 어린이들을 위해 교회 안에 주일학교를 개설했고, 교회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조사나 영수를 세워 교회를 유지하게 했으며, 어떤 곳에는 전도부인을 세워 전도하기도 했다. 브루언의 개인선교 보고(1913-1914년)에 따르면 37개 교회를 순회 방문했다고 기록했다. 박창식은 브루언 선교사가 참여한 19개 교회의 개척 상황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그가 개척하고 참여했던 교회들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인 김천지방, 구미지방, 상주지방, 문경지방에서는 한국인에 의한 자립교회들도 설립되었음을 알수 있다. 이 지역의 교회 개척과 성장에 브루언 선교사가 끼친 영향력이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구제일교회(현 대구제일교회 기독교역사관)

| 청라언덕과 청교도 정신

‘청라언덕’이란 ‘푸른 담쟁이 넝굴이 무성한 언덕’을 지칭하는 말이다. 담쟁이 넝쿨은 담장이나 벽돌집을 잘 타고 올라 가면서 그곳에 견고히 부착되어 사면을 푸르게 한다. 현재 동산병원의 동쪽 언덕이 언제부터 ‘청라언덕’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이 땅은 달성 서씨의 종중 산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수많은 묘지가 산재해 있었던 민둥산이었다. 초기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가 선교부지로 매입해 그 위에 선교사들의 거주 주택을 짓고서부터 그들의 활동 무대가 된 동산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붉은 벽돌로 서구식 집을 짓고 그들 집의 경계인 담벼락과 벽돌집 주변에 담쟁이인 청라를 심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대구에 온 선교사들은 대부분 미국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에서 파송한, 청교도 정신을 가진 자들이다. 영국에서 건너온 청교도들이 미국 북동부 지역에 정착해 삶의 터전을 일구고 신앙과 교육을 위해 교회와 학교와 병원을 세웠다. 그들이 세운 교회, 학교, 병원은 신대륙 최초의 종교기관, 교육기관, 의료기관이었다. 그들이 선교와 교육을 목적으로 세운 선교학교가 대부분 세계적인 사립명문대학교로 성장 했다. 그 명문대학들에는 대부분 담쟁이, ‘청라’(IVY)가 심겨 있다. 그래서 이 대학들을 일컬어 ‘청라리그 대학’(IVY League School)이라 한다. 특별히 이 대학들 가운데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펜실베이니아 대학은 철저한 청교도 정신을 학습 목표로 정했고, 성경을 배우도록 하는 조항을 두기도 했다.
특별한 것은 대구의 청라언덕이 교육, 역사, 의료선교의 역사적 현장이라는 사실이다. 19세기 후반부터 개회되기 시작한 대구근대사의 요람이 청라언덕이다. 청라언덕과 맞물린 이 동산에 대구 기독교 교육의 요람들이 역사적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대구의 교회와 주일학교가 시작된 요람인 대구제일교회가 세워진 동산, 여자 소학교에서 중·고등학교로 발전하고 성장한 신명여자중·고등학교가 자리 잡은 동산, 동산의 언덕과 맞물린 건너편 언덕에 세워진 계성중·고등학교, 의료선교의 모체인 제중원이 세워지고 후일에 동산병원과 동산의료원으로 발전했고, 간호사들을 양성하는 간호대학이 세워져 있는 동산, 대구 땅에 와서 열악한 환경, 창궐하는 질병, 비위생적 생활 속에서 대구의 복음화와 개화된 문명을 위해 애쓰다 순교한 선교사들의 무덤이 있는 동산,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며, 기독교 정신으로 뭉쳐진 학생들과 시민들의 함성이 메아리쳤던 3.1운동길이 있는 동산, 젊은 남녀가 품은 가슴속 깊은 사랑이 가곡으로 표현된 청라언덕의 ‘동무생각’ 노래비가 세워져 있는 동산, 이 모든 역사의 자취와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이 청라언덕은 선교사들이 심은 청라(담쟁이 넝쿨)의 기상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뿌리가 되고, 개혁신학을 꽃피운 청교도 신앙과 선교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곳이다.
청라언덕은 청교도 정신이 스며들고 퍼져나간 신앙과 신학의 요람이다. 대구에 부임한 미국 선교사들인 베어드, 아담스, 존슨, 브루언, 플레처, 마펜과 그들의 가족은 모두 강력한 청교도 정신과 청교도 개혁신학을 지켜낸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소속이었다. 청교도 개혁신학의 영향력 때문인지 대구 경북 지역에는 유독 장로교회가 많고, 신학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한 곳이 된 듯하다.

청라언덕(출처: 대구광역시 중구 문화관광)

| 나가며

미국 북장로회에서 파송된 이 선교사들의 헌신과 희생적인 정신을 대구의 교회들과 한국교회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선교사들이 행한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사역과 희생의 가치를 잊지 않고, 후손들에게 전해야 하며, 대구·경북의 영적성장과 발전을 위해 오늘의 교회들이 본받고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신앙의 후손들인 오늘의 교회가 해야 할 몫이다.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딛은 후 한국교회는 선교 140주년을 맞았다. 선교를 위한 서양 선교사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대한민국은 그 이후 선교받는 국가에서 선교하는 국가로 성장해 열방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암울했던 시기에 미국 선교사들의 발자취 따라 대구경북지역 북장로회선교사들의 사역무대를 소개하고자 한다. ‘청라(靑蘿) 정신과 대구·경북 근대문화’(전재규·황봉환 공저) 책 일부를 전재규 박사로부터 허락을 받아 게재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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