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곧바로 사임하고 새로운 목회 사역지를 얻기 위해 몇 가지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 당시 컴패션(Compassion)이란 선교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내가 맡은 임무는 시각장애원이나 고아원을 찾아가서 사흘 간 부흥집회를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마땅한 사역이 되지 못했다.
어느 날 후배 전도사가 미국에서 온 선교사의 통역 일을 소개해 주어 도와준 덕에 400불의 통역비를 얻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내가 어려울 때마다 경제적 위기를 넘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세상의 보통 여자들은 돈 많고 인물 잘나고 학식이 높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꿈이다. 그런데 나와 결혼한 아내는 나의 어떤 점이 좋아서 결혼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결혼하기 전 만일 내가 가정을 이루면 남부럽지 않게 아내에게 잘해 주고 자녀들에게는 내가 누리지 못했던 부모의 사랑을 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가정을 꾸미고 딸들을 낳고 보니 내가 꿈꾸던 가정을 이끌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없었다. 현실은 너무도 차갑고 냉정했다.
우리 부부는 결혼 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 때로는 포장마차에서 파는 찐빵 한두 개, 고구마나 국수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운 적도 많았고, 그것도 없으면 물 한 그릇으로 배고픔을 달래기도 했다. 아내 자신은 점심을 굶어 가면서도 내게는 도시락을 싸 주었다. 이런 우리를 보시고 임마누엘 고아원 원장님께서 보리쌀 한 가마를 선물로 주셔서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뻐한 적도 있었다. 한때는 아내가 보험사원이 되겠다고 나선 적이 있었으나 며칠을 다녀도 실적을 한 건도 올릴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그만두었다.
일본 사람들이 살던 적산가옥. 연탄냄새가 스며들어 오고, 천장에서는 쥐가 마라톤을 하고, 사철 빈대와 벼룩이 들끓던 그곳에서 우리 가족이 큰 병 걸리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건강을 지켜 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하루 종일 빈 집에 어린 딸들만 두고도 아무런 사고가 없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족들을 지켜주셨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 가족이 가난한 살림을 꾸려 나가던 중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곽안전 목사님의 소개로 나는 영국사람을 만나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는 내게 많은 비전을 제시해 주었고 사례비도 후하게 주었다.
그런데 그와 함께 일하고 있을 때 총무로 들어온 이 모씨로 인해 나는 또 다른 어려움을 만났다.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다른 길을 찾고 있었다. 마침 친구로부터 미국에 들어오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아이구 이젠 살았다’ 하는 심정으로 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긴 것같이 좋았다. 일년 가까이 미국에 머물다가 돌아왔다.
미국에 가기 전이나 다녀온 뒤나 생활은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그러나 마치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까마귀를 보낸 것같이 내게도 그와 같은 기적이 종종 일어났다. 아내는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걱정 없으니까 낙심하지 말라고 내게 용기를 주기도 했으나 그도 사람인지라 때로는 짜증도 냈다.
아내는 외모가 단정해야 많은 사람에게 호응을 받는다면서 항상 낡은 옷이지만 깨끗하게 손질해 주었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어 주어서 내가 일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지금도 신문이나 책들을 내게 읽어 준다.
두 딸을 기르면서 마음 아팠던 일들이 생각난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가게가 있었는데 그 가게에는 아이스크림, 과자, 빵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그 근방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와서 내게 “아빠, 아이스크림 사 주세요.” “맛있는 과자 좀 사 주세요”라고 졸라도 돈이 없어서 그것을 못 사준 것이 나의 가슴 한구석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 또 겨울에도 남과 같이 따뜻한 내복에 코트, 털 신발을 사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두 딸을 잘 키워 주셔서 큰딸은 성악을 전공했고 작은딸은 피아노를 전공해 제각기 자기 길을 가고 있다. 아내와 딸들은 비록 내가 시각장애인일지라도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평소에 정상인과 똑같이 대해 준다.
김선태 목사
<실로암안과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