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전라도가 고향이지요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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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일학교’ 민족 교육 요람이자 3.1운동 중심지

타마자 선교사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 숭일학교에서 나올 것을 기대하고 철저하게 성경대로 살라고 역설했다.

3·1 운동과 숭일학교

전남 지방의 3·1 운동은 미션학교인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가 주동이 되어 전개했다. 이미 광주의 두 미션학교는 그동안 교사로부터 철저하게 민족주의 훈련을 잘 받아 왔으며, 매일 아침의 채플 시간을 통해서 스스로 민족의식을 고취시켜 나갔다. 이러한 일로 남궁혁, 김강, 최병준은 교실에서 수업에 임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이것은 훗날 광주 지방에서 3·1 운동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중 최병준 교사는 애국교사답게 3·1 운동 거사를 앞두고 오원기념각 채플 시간에 다음과 같이 외쳤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몸을 희생해 계급제도를 타파하고 자유를 위해 애쓰셨습니다. 기독학생인 우리는 어떠한 장애라도 배제하고 그 목적의 수행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정재철,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사, 212쪽)

숭일학교 학생들은 영어교사 남궁혁 학감 집에 모여 태극기를 만들며 밤을 새웠으며, 한편 학교 지하실에서는 독립선언서 인쇄에 여념이 없었다. 몇 날을 밤낮 가리지 않고 만들었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자그마치 6가마로 수천 장이 되었다.

“인원 동원에는 서정희가 일반 시민을, 김강은 교인을, 홍승애는 수피아여자고등보통학교를, 숭일고등보통학교는 교사인 최병준이 맡았으며, 최영균, 김용규 등은 시내의 각급 학교 학생들을 맡고 독립선언서, 태극기, 국가 등의 인쇄는 최한영이 맡았으며 준비자금은 대부분 이기호가 담당했다.” (광주시사 2권 378쪽)

숭일학교 학생들은 드디어 3월 10일 오후 3시가 되자 운동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때 교사 최병준의 인도하에 가마니에 담아 두었던 태극기, 독립선언서 등을 꺼내 들고 일반 서민들에게 나눠 주면서 시내 북문통으로 향했다. 장터에는 삽시간에 1천여 명이 모여들었으며, 광주 교외에 있는 광산군 지산면 알곡리에 사는 이주성은 숭일학교 출신인 이윤호, 이창호 형제와 함께 수백 명의 군중을 이끌고 광주 장터로 향했다.

3·1 운동의 물결은 삽시간에 널리 퍼져 나갔으며, 이 일로 일경들과 헌병들은 당황해 했다. 이때 누가 칼을 휘둘렀는지는 모르지만 군중들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계속 만세를 불렀다. 이러한 만세운동은 그 다음 날도 계속됐으며, 이에 놀란 일경들과 헌병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체포에 혈안이 됐다.

이 일로 숭일학교 교사를 비롯해 많은 학생들이 체포됐다. 이 중 교사 최병준과 김강은 각각 3년형을 받았으며, 그 밖의 학생들 가운데 송광준 외 26명이 구속돼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 갇혀 있는 교사와 학생들을 위해서 숭일학교 학생들은 기숙사에 모여 밤을 지새우면서 기도에 열중했다. 소식을 듣고 일경과 헌병의 감시가 더욱 심해졌지만 학생들은 여기에 개의치 않고 더 열심히 기도해 결국 숭일학교 기숙사는 민족운동의 아지트가 됐다.

그런데 특별과(전문대 과정)에 재학 중이다가 감옥에 갇힌 송광준은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중 일경의 극심한 고문으로 옥사하고 말았다. 이때 숭일학교 학생들은 그의 시신을 인수하기 위해 상여를 만들어 송정리역에서부터 숭일학교까지 운구하려고 준비했다.

“숭일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광주청년회 20~30명의 동지들은 가지고 온 유해를 받아 상여에 안치한 채 30리길 광주까지 운구했으며, 연도에 늘어선 많은 주민들은 송광준의 상여에 고개를 숙여 애도를 표했다. 광주 송정리 사이에서 송광준의 운구와 더불어 또다시 민심이 술렁거리기 시작하자 일본 경찰은 숭일학교 지하실에 안치해둔 유해를 압수해 버렸다. (숭우 제30호, 34쪽)

일제는 기독교 정신으로 설립된 숭일학교를 뿌리째 뽑아 버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던 중 1937년 중일 전쟁을 계기로 해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러나 숭일학교와 같이 3·1 운동에 참여한 수피아여학교도 이에 반대하자 온갖 방법으로 학사 운영에 어려움을 줌으로써 학교를 폐쇄하기까지 했다.

1940년 선교사들이 모두 철수하자 숭일학교는 일본 병사들의 훈련장과 병사의 숙소로 징발당했다. 1945년 8월 15일을 맞아 동문인 김현승 등 많은 사람들이 복교에 힘을 기울이면서 다시 양림동에는 새로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이 학교 출신인 시인 김현승은 학생들에게 기독교문학의 진수를 알려야 한다면서 문학운동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오원기념각도 다시 숭일학교 학생들의 채플실이 되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목회자의 길로 갔다. 그리고 전남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기독교의 지도자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동문이 2만 명이나 된다니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4)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대한민국 초대 외무부장관을 역임했던 조정환, 군정시대 전남지사를 역임했던 최영욱 박사, 이어 정부수립 후 초대 지사였던 이남규 목사도 유일하신 하나님을 섬기면서 말씀을 배웠던 숭일인이었다.

그렇게 역사가 깊고 민족운동의 요람지였던 양림동 캠퍼스를 정리하고 그동안 운암동 캠퍼스 시절을 거쳐서 지난 1993년에는 광주 북구 일곡동 2만5천 평의 대지 위에 연건평 5천200평의 현대식 빨간 벽돌로 건축하고 중·고 재학생 2천600여 명의 학생이 기독교 문화를 터득해가고 있다. 더욱이 일곡동은 1919년 3월 10일 지산면 일곡리에서 숭일학교 출신들이 만세를 주동하면서 광주장터까지 와서 만세를 부르기도 했던 역사적 현장이다. 지금도 숭일의 캠퍼스에서는 일곡리의 만세 함성 소리가 되살아 들려오는 것 같다.

오원 선교사와 오원기념각

광주시 양림동에는 아직도 선교사들의 숨결이 담겨져 있는 오원기념각이 광주 기독병원 간호전문대학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오원기념각은 오원 선교사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서, 그는 평생사업이었던 기독교 문화 사업을 위한 기독교 센터 설립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원 선교사는 목사이면서 의사였다. 그래서 그에게는 어렵고 힘든 많은 일들이 주어졌다. 육신의 병을 고쳐 주어야 하는 의사, 영혼의 병을 고쳐 주어야 하는 목사로 뛰었으니 말이다.

안영로 목사

· 90회 증경총회장

· 광주서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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